독립운동가의 딸, 무대와 세상을 밝히다
배우 홍지민

2025. 08

무대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 아래,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뮤지컬 배우 홍지민.
그녀의 삶에는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더불어,
독립운동가의 딸로서 이어온 도전과 나눔의 역사가
깊게 흐르고 있다.

글. 백미희
사진. 김경수

꿈과 성공, 좌절과 성장의 여정

1960~1970년대 미국 음악 산업을 배경으로, 여성 보컬 그룹의 성공과 갈등, 성장과 화해를 그린 작품인 뮤지컬 <드림걸즈>.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폭발적인 가창력과 강한 자존심을 지닌 메인 보컬 에피 화이트가 있다. 2009년 뮤지컬 <드림걸즈>로 한국 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홍지민 배우에게 있어서 에피 화이트 역할은 마치 페르소나 같다.
“제가 지금은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어요.
어린 시절부터 배우와 가수의 꿈을 키우며 상경해서 치열한 시간을 보내왔어요. 결국 뮤지컬 배우로서 자리를 잡고 결혼도 했죠. 다양한 일을 경험하며 꿈을 향해 도전하고 성장하며 삶의 다양한 굴곡을 겪은 에피 화이트와 저의 삶이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홍지민 배우는 1996년 뮤지컬 <애랑과 배비장>으로 데뷔한 이후, <드림걸즈> 이외에도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스위니토드>, <그리스> 등 다양한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30년 넘게 무대와 방송을 오가고 있다. 그는 지난해에 태권도 4단도 취득했다.
태권도 4단은 사범(지도자) 과정에 도전할 수 있는 성인태권도 레벨이다.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배워온 홍지민 배우는 이를 통해 체력뿐 아니라 마음의 힘도 키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린 딸에게 태권도를 배울 것을 권유한 이는 바로 아버지 홍창식 선생이었다.

홍지민
대한민국 대표 뮤지컬 배우이자, 독립유공자 홍창식 선생의 딸로 <드림걸즈>, <맘마미아>, <브로드웨이 42번가>, <스위니 토드>, <그리스> 등 다양한 뮤지컬과 드라마, 영화, 예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세 딸의 아버지

홍지민 배우의 아버지 홍창식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절, 16세의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조직인 ‘백두산회’에 가입해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백두산회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로, 이곳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아버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고, 옥중에서 해방 소식을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광복절은 저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날이에요.
광복절 이후 아버지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결국 어머니를 만나 지금의 저도 태어났으니까요.”
홍지민 배우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풍류를 아는 멋쟁이였다. 영문과출신으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했고, 음악과 책을 사랑하는 아버지. 책이 너무 많아서 이사할 때마다 무거운 책을 이고 지고 다니느라 고생도 많았다.
“스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실 독립유공자보다는 ‘멋을 아는 아빠’로 기억해요. 엄마가 노래를 잘하셔서 사람들은 제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저는 아버지 판박이에요. 제가 가수의 꿈을 품게 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크죠. 고향을 그리워하며 <두만강 푸른 물>을 부르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가족과 함께한 졸업 사진(위)
웅변대회에 참가한 어린 시절의 홍지민 배우(아래)

홍창식 선생은 한국의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그 영향을 받아 세 딸은 학창 시절 내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모두 다 대학에 진학했다.
“사실 그때 아버지 사업이 잘 안되어서 형편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면서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죠. 지금까지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그래서 저는 경기도민으로서 경기도 정책 중에서 차상위계층 국가유공자를 위한 ‘생활보조 보훈수당’ 같은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아직도 열악한 환경에서 사시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많다고 들었어요.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 개선사업이 꾸준히 확대되어서 그분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딸의 기억 속 홍창식 선생은 나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통닭을 사 올 때는 꼭 3~4마리씩 사 오고 수박도 몇 통씩 사와 꼭 이웃과 나눠 먹었다. 그에게는 광복회를 도와 독립유공자의 자격 증명을 도왔던 아버지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당시 관련 기록을 잘 챙겨두셔서 바로 독립유공자 훈장을 받으셨는데, 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분 중 증빙을 못 해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광복회에서 그분들을 도와 독립유공자 명단을 작성했죠. 저는 당시에 어려서 뭘 몰랐는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어떻게 16살에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고, 감옥생활을 견딜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가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을 주었죠.”
아직도 기록되지 못해 잊힌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많이 남아 있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독립기념관 건립 준비와 관련해 경기도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관련 사료를 수집하고 판결문, 수형인명부 등을 통해 독립운동가의 사료를 정리해 누락 인물이 있으면 국가보훈부에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할 예정이다. 또한, 독립유공자 2~3세대를 만나 정리하는 구술자료의 발간도 검토 중이다.
저는 경기도민으로서 경기도 정책 중에서
차상위계층 국가유공자를 위한 ‘생활보조 보훈수당’
같은 부분에 관심이 많아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 사진 제공 : ㈜샘컴퍼니

아버지의 유산, 사랑과 나눔으로

나이가 들수록 홍지민 배우에게 아버지의 모습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몇 년 전부터는 나눔을 실천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본받아 기부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2021년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국내외 구호 캠페인과 미혼모 자립 지원 등 다양한 나눔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2023년에는 기아대책 고액후원자 모임인 필란트로피클럽 334호 회원으로 위촉되며, 1억 원 이상을 기부 또는 약정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올해에는 경남·경북 산불 피해 지역 이재민을 위해 1,000만 원의 성금을 기부하는 등 재난 구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저는 제 뿌리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능이 꽃을 피워 뮤지컬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이제야 철이 들어서 아버지의 나눔 정신을 실천하고 있어요.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아버지처럼, 저 역시 가정 안에서 행복을 찾고, 무대에서 열정을 꽃 피우고,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거예요.”

Tip.

독립운동가 홍창식(1926~1992)

1942년 1월 초순경 김세보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백두산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양창순의 지도 하에 최학준·이승대·김동호·최이모 등 동회의 동지들과 함께 함북 성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43년 3월 그를 비롯한 김세보·양창순·박종대·심시준 등 9명의 동지들이 일경에 붙잡혔다. 1944년 5월 1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출처 :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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