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 의거를 주도한 조문기 지사

2025. 07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만의 역사가 아니다. 미래를, 후손을 위한 운동이다. 과거사 청산은 친일파 청산부터 첫발을 내디뎌야 하고, 친일파 청산이 안 된 지금의 한국사회는 여전히 독립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던 조문기(1927. 5. 19.~2008. 2. 5.) 지사의 말이다.
부민관 폭파 의거를 주도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여준 그는 죽는 날까지 조국에 헌신했다.

정리. 편집실
참고·사진 공훈전자사료관, 디지털화성시문화대전

일제에 대항한 파업

1927년 5월 19일 경기도 수원군 매송면(현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서 조병길과 연안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매송면 원평리에 위치한 매송보통학교를 다녔으나, 학비를 내기 어려워 용인군 양지면에 있는 외가에서 살며 양지공립보통학교 3학년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1942년 10월 일본으로 건너가 가나가와현(神奈川縣) 가와자키시(川崎市)에 있는 일본강관주식 회사에 훈련공으로 강제수용된 조문기 지사는 이곳에서 경기도 안성군 출신인 유만수를 만나 동지가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 노무자에 대한 멸시와 탄압이 극심한 상황을 겪으며, 유만수와 파업을 계획하였다. 1943년 5월 민족 차별에 반대하는 한국인 노무자 1,000여 명이 3일 동안 시위를 일으키자, 동참한 후 이를 주도하였다. 이때 요코하마(橫濱) 헌병대·가와자키시 경찰 80여 명에 포위된 채 투쟁하다가 유만수와 함께 지명수배를 피해 귀국하였다.


부민관 폭파의거 삼의사. 강윤국(왼쪽), 조문기(가운데), 유만수(오른쪽)


일제하 마지막 의거의 주역

1945년 5월, 조문기 지사는 서울 관수동 유만수의 집에서 유만수· 강윤국·권준·우동학 등과 비밀결사 대한애국청년당을 결성하고, 대일투쟁을 결의하였다. 이때 친일 민족 반역자인 박춘금이 친일 단체인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하고,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아시아민족의 전쟁 수행을 위한 대동단결을 강조하기 위하여’ 7월 24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에 유만수 등과 함께 대회에 참석하는 일제 고위 간부와 친일파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회장인 부민관을 폭파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1945년 7월 24일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조문기 등은 사전에 군 공장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쳐 양철로 싸서 폭탄을 만든 후 화장실과 무대로 들어가는 복도에 폭탄을 설치 하였는데, 오후 9시 10분경 폭탄 2개가 연속으로 터져 강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대의당 당원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예정보다 빨리 폭발해 계획에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 의거였다. 이 ‘부민관 폭파 의거’ 후 일본 경찰은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현상금을 내걸며 폭탄을 던진 자들을 찾아내려 했으나,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지 못하였다.

최후의 순간까지 애국지사로

조문기 지사는 의거 이후 조동필·유태현 등과 매송면 노림리의 야학당 (夜學黨)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고, 이후 거사의 주인공으로 밝혀졌다. 그는 광복 이후에도 활발한 민족운동을 벌였다. 2006년 11월 골수종과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경기도 수원의료원에서 투병하였으나, 2008년 2월 5일 사망한 후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특히 문익환 목사 장례식처럼 시민사회단체가 마련하는 겨레장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되었다. 회고록으로 《슬픈 조국의 노래》가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를 주도해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여준 조문기 지사는
죽는 날까지 조국에 헌신했다.



With.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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