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위해 순국한 아버지와 아들
이천의 구연영·구정서 부자

2025. 11

일본 낭인들이 왕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고향 이천에서
의병을 모아 무력투쟁에 나섰다가 이에 한계를 느끼고 애국의 수단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사람이 있다. 바로 구연영(1864~1907) 선생의 이야기다. 그는 이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아들 구정서(1882~1907)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7년 8월 이천 장터에서
아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 아들은 25세였다.

글. 편집실
참고자료. 공훈전자사료관, 경기일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본과 맞서 싸운 의병장, 구연영

구연영 선생이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는 것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항일의병이 봉기하던 때였다. 선생이 장성하던 무렵, 일제의 침탈로 인해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일제는 1894년 6월 자국의 군대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는 등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개혁, 근대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의 전통적 문물제도를 일시에 바꾸는 갑오경장을 강제로 추진함으로써 정치·문화적 침략을 병행했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을미사변과 단발령도 이러한 일제 침략의 일환으로 자행된 것이었다. 이에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 각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의병이 봉기해 항일투쟁이 전개됐다.
선생이 중심인물로 참여했던 이천수창의소(남한산성의진)는 1895년 11월 15일(음) 단발령 공포 직후 전국에서 가장 먼저 편성되어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한 달 이상 점거한 채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성세를 크게 떨친 의진이다. <동경조일신문> 등 일본 신문들이 남한산성 점거 과정에서부터 해체 때까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의진의 동향을 상세히 보도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이천에서 구국회(救國會)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했다. 선생이 조직한 구국회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을 실천하여 구국, 곧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경기도 광주 구연영 묘 전경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독교 신자로서 구국운동의 전면에 서다

하지만 선생의 의병활동은 수세에 몰리며 종료되었고 1896년 여름, 고향으로 돌아와 광주에 정착한 뒤 기독교에 투신하여 새로운 구국투쟁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오랜 인습에 젖은 주변 사람들로 인해 선생의 선교 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종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파격적 행동으로 집안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구국투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이천에서 구국회(救國會)라는 애국단체를 결성했다. 선생이 조직한 구국회는 이처럼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소망·사랑 등 세 가지 강령을 실천하여 구국, 곧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선생이 교회활동과 구국투쟁을 열심히 병행해 갈 수 있었던 데는 장남인 구정서의 조력과 역할이 컸다. 구정서는 일찍이 부친을 따라 상동교회에 올라와 엡윗청년회에 가입하여 교회활동과 구국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부친을 도와 구국회의 조직과 실무를 도맡아 구국활동을 적극 펼쳐나가고 있었다.

1907년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자구몰’이라는 제하의 기사다. 선생 부자가 순국한 지 5일 뒤에 실린 것이다. 선생은 일진회원의 밀고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구정서와 함께 체포됐다.

(좌) 구연영 ⓒ 공훈전자사료관 (우) 구정서 ⓒ 공훈전자사료관
이후 동지들을 대라는 고문을 받았는데, 선생은 의연히 “이 땅에 와서 너희들이 이처럼 무도한 강도질을 하는데 하나님이 무심하실 줄 아느냐. 동지들을 말한다면 일진회 놈들을 빼고는 모든 백성이 나의 동지들이다”라고 하며 오히려 일제의 죄상을 성토했다고 한다. 선생은 구정서와 함께 1907년 8월 24일 총살을 당해 부자가 동시에 순국했다.
유교에서 기독교로 종교와 이념을 바꾸고, 무장투쟁에서 대중구국운동으로 투쟁방법을 과감하게 바꿔갔던 선생은 마침내 교회와 민족 두 가지를 동등한 절대가치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수호하기 위해 순국·순교를 감내한 동시대 역사의 위인이었다.


일병 50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衝火) 하였다더라. -1907년 8월 29일자 <대한매일신보>


광복회 경기도지부 인스타그램

Tip.

    광복 80년을 맞아, 경기도와 광복회 경기도지부가 <올해의 경기도 독립운동가> 80인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 80편을 순차적으로 공개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광복회 경기도지부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