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이자 정치사상가이며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골자로 한
삼균주의를 제창하여 임시정부 정강정책의 바탕으로 삼은 인물 조소앙 선생.
선생의 집안은 11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이 중 한 사람인 조계림 애국지사는 조소앙 선생의 딸로서
부친의 활동을 보좌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리. 편집실
참고·사진 공훈전자사료관, 우리문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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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외무부 직원으로서 일하다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7월 5일, 중국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부장 조소앙) 앞으로 중경주재(重慶駐在)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가 다음과 같은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다.
“부장 각하! 저는 1944년 6월 26일 자의 각하의 서한을 감사히
받았음을 알려드리는 영광을 먼저 전합니다. 동시에 각하의 요구를 받아들여 각하가 보내온 성명서와 각서 모두를 외무부를 통하여
저희 정부에 전달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기회에 체코슬로
바키아 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과 더불어 가장 성실한 동정을,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보내는 것을 확신하는 바입니다. 우리들의 적을 격멸할 날이 가까워져 오는 것은, 동시에 고귀한 국민의 해방을
가져오는 것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날이 곧 오기를 저는 빕니다. 부디 부장 각하께서는 저의 최상의 존경의 표시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큰 수난의 가시밭길이었는지 푸른 눈의 체코슬로바키아 대사의 편지에서도 절절히 느껴진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임시정부의
외무부 직원으로 대내외 일을 맡아서 헌신한 여성이 있다. 바로
조계림 애국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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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림 애국지사
어려운 시기에 임시정부의 외무부 직원으로
대내외 일을 맡아서 헌신한 여성이 있다.
바로 조계림 애국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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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다
조계림 애국지사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의 독립운동을
보좌하며 1939년 창설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서 통신·
정보수집·모금활동을 하였고, 1940년 5월 중국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총무과원으로 근무하였다. 또한, 1943년 4월 2일 개최된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외무부 과원으로 선임되어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5월에는 중경에서 한국국민당, 재건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당이 통합하여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여성 당원으로 독립운동의 맨 앞에서 활약하였는데, 1945년 광복 때까지 임시정부에 몸을 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한 조계림 애국지사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65년 7월 14일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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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과원 선임에 관한 공보 기록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80호』 194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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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경기
광복 80년을 맞아, 경기도와 광복회 경기도지부가 <올해의 경기도
독립운동가> 80인의 이야기를 담은 웹툰 80편을 순차적으로 공개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광복회 경기도지부 인스타그램과 경기뉴스광장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