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하였다.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경기 권역의 재편작업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도읍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부 지역은 경기에서 제외되고 새로운 지역이 포함되었다. 1402년(태종 2) 경기좌도와 우도를 합쳐 경기좌우도성(京畿左右道省)이라 하였고, 1414년(태종 14)에는 명칭을 ‘경기’로 정했다. 지속적인 권역 조정 결과 경기도는 한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군현이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8도 체제 아래 국왕과 중앙 정부가 있는 수도의 주변지역을 담당하는 도(道)로 편제된 것이다. 최고 책임자는 경기관찰사였고, 도의 행정・사법・군사의 전권과 함께 지방 수령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졌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경기관찰사는 4개의 목(牧)목, 7개의 도호부(都護府), 7개의 군(郡), 19개의 현(懸) 등 37개 고을을 다스렸다.
경기도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어 국왕의 행차와 중앙 관료들의 출입이 잦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관방시설이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한양 주변의 성곽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경기도에는 도시근교의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이 활성화되었다.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활성화는 농촌장시(場市)와 나루・포구를 확대 발전시켰다. 18세기 중엽 경기도내에 100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전국에서 손꼽히는 15개 장시 중 4개(광주의 사평장・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를 보유하였다. 광주 일대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옹원의 분원에서 각종 도자기들을 제작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정조 때의 수원화성 축조는 조선시대 최대의 건설공사였다.
경기도는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이후 기호학파는 주로 경기지방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18세기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양명학 연구가 안산(정제두)에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으로 특징짓는 실학은 서울 주변을 둘러싼 안산(이익)・광주(안정복)・남양주(정약용)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출처 및 사진제공 : 경기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