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경기도

고려 여주 고달사지 전경

고려 여주 고달사지 전경

궁예 휘하에 있던 송악(개성) 출신 왕건이 해상세력을 바탕으로 918년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어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歸附)함으로써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936년에는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를 멸하여 후삼국 통일을 달성하였다. 발해유민까지 흡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통일민족국가가 된 고려는 개경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군사적・지리적 요인뿐만 아니라 왕건의 고향으로서 세력의 근거지라는 점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려왕조는 각 지방세력과의 타협 속에서 점차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였으며, 그것을 이끌어간 중심세력은 바로 근기(近畿), 즉 경기지역 출신들이었다. 고려의 ‘경기’는 국왕의 근거지・직할지를 뜻했다. 태조 이래 개경과 그 주변은 왕실의 기반지로서, 또 국왕과 왕실을 보위하는 관료 등 지배층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고려 말에는 경기지역이 하나의 도(道)로 정착하게 되는데 13개 현에서 44개 현으로 확장하였고, 좌도와 우도로 나누었고, 각기 도관찰출척사(현재의 도지사)를 파견하였다. 이때의 경기지역을 오늘날 행정구역 기준으로 보면 안산 이북의 경기도와, 강원도 철원, 황해도 남부지역에 해당하며, 지금의 경기도에 비해 다소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기도 지역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구심력 있고 통일적 모습을 갖추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으며, 거란과 몽골,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에 맞서 왕조를 지켜내는 중추 역할을 하였다.

출처 및 사진제공 : 경기학연구센터

조선시대의 경기도

18세기 경기도 지도

18세기 경기도 지도

조선 북한산성 전경

조선 북한산성 전경

1392년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개국하고,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결정하였다.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경기 권역의 재편작업도 불가피하게 되었다. 도읍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일부 지역은 경기에서 제외되고 새로운 지역이 포함되었다. 1402년(태종 2) 경기좌도와 우도를 합쳐 경기좌우도성(京畿左右道省)이라 하였고, 1414년(태종 14)에는 명칭을 ‘경기’로 정했다. 지속적인 권역 조정 결과 경기도는 한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군현이 한강과 임진강을 중심으로 분포하게 되었다. 8도 체제 아래 국왕과 중앙 정부가 있는 수도의 주변지역을 담당하는 도(道)로 편제된 것이다. 최고 책임자는 경기관찰사였고, 도의 행정・사법・군사의 전권과 함께 지방 수령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졌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경기관찰사는 4개의 목(牧)목, 7개의 도호부(都護府), 7개의 군(郡), 19개의 현(懸) 등 37개 고을을 다스렸다.

경기도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어 국왕의 행차와 중앙 관료들의 출입이 잦았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관방시설이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한양 주변의 성곽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축성에 힘을 기울였다.

17세기 이후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경기도에는 도시근교의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이 활성화되었다. 농업과 수공업에서의 상품생산의 활성화는 농촌장시(場市)와 나루・포구를 확대 발전시켰다. 18세기 중엽 경기도내에 100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전국에서 손꼽히는 15개 장시 중 4개(광주의 사평장・송파장, 안성의 읍내장, 교하의 공릉장)를 보유하였다. 광주 일대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사옹원의 분원에서 각종 도자기들을 제작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정조 때의 수원화성 축조는 조선시대 최대의 건설공사였다.

경기도는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16세기 이후 기호학파는 주로 경기지방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18세기 주자학을 극복하려는 양명학 연구가 안산(정제두)에서, 조선후기의 새로운 학풍으로 특징짓는 실학은 서울 주변을 둘러싼 안산(이익)・광주(안정복)・남양주(정약용) 등지에서 발달하였다.

출처 및 사진제공 : 경기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