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만든다. 하지만 이들의
위대한
업적에 가려진 또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그리 크게 조명받지 못했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 혹은 남편, 형제 그리고 어머니⋯ .
독립운동가보다 어쩌면 더 큰 헌신으로
이들의 삶을
지지했던 가족들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정리. 편집실
참고·사진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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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 위대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올바른 일을 하다 맞이하는 죽음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맞서라고. 그리고 그것이 효도라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한 도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의 내용이다.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각오한 아들의 다짐을 끝까지
지켜준 어머니는 바로 조마리아 여사다. 안중근 의사의 죽음 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장녀이자 자신의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찬양과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아들의 유지를 제대로 선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여사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고,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할 뿐만 아니라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으며,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실로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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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 회갑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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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가족이 함께한 독립운동,
신건식·오건해 부부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큰형 정식의 아들),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신규식의 사위는 민필호이고, 민필호의 사위는 김준엽으로 옹서(翁壻, 장인과 사위)가 독립운동가로 연계되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야말로 독립운동
명문가인 셈이다.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신건식 선생은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고향에서 딸을 키우던 오건해 선생 역시 이후 남편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했다. 오건해 선생은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 데 정성을 다했다. 사위 박영준은 장모를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으로 회고하였다. 또한, 오건해 선생은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그녀의 활동은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하였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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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오건해 부부와 딸 신순호
이은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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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일가 독립운동의 버팀목이었던
이은숙 선생
가족 중 한 사람만 독립운동을 해도 온 집안이 풍비박산났던 시절,
이회영 선생의 가족은 6형제에 이어 자녀들까지 2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던 엄청난 가족이다. 선생의 집안은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 10대조 선조이며 여섯 명의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이자, 명동 땅의 3분의 1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자산가였으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운용했다. 그리고 이 중심에 이회영 선생의 아내였던 이은숙 선생이 있었다.
20세에 이회영 선생과 혼인한 이은숙 선생은 일가족과 함께 만주 류허헌(柳河縣) 싼위안푸(三源堡)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설립 등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일조하였다. 이후 이회영
선생을 따라 베이징으로 이동하여 임신한 몸으로 남매를 돌보며, 독립운동가를 보필하는 삶이 계속되었다. 국내에 귀국해서도 그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은 계속되었다.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한
자금을 이회영 선생에게 보내기도 했는데, 1926년에는 자금 마련
일이 경찰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8년부터는 경성부 병목정에 있는 고무공장(경성직뉴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바느질로 장충동 일대 기생의 옷을 만들었으며, 그렇게 모은 돈을 아껴 베이징으로 보냈다. 1930년 들어 경찰의 단속으로 바느질
마저 여의치 않자, 남의 집의 가사를 돕는 일을 하기도 했다. 평생을
남편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녀의 삶은 끝까지 고달팠지만, 그녀의 헌신이 있었기에 이회영 가의 독립운동은 계속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