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이 처음 세상에 나온 순간을 엮은 ‘처음책방’

2026. 02

이천시 모가면의 고즈넉한 풍경 속, 햇살이 스며드는 유리창 너머로 고요한 세계가 펼쳐진다.
나무 책장마다 오래된 활자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고, 공기에는 잉크와 종이 냄새가 섞여 있다.
30년 동안 한 사람이 모은 초판본과 창간호가 쉼 없이 숨 쉬는 공간, ‘처음책방’이다.

글. 백미희
사진. 김규남
월간 <현대문학> 초판본들

초판본과 창간호가 빼곡한 전시장 같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유리 진열장 안에 정갈하게 놓인 귀한 초판본들. 박경리 작가가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한 월간 <현대문학>부터 최인훈의 <광장>, 박완서의 <나목>, 김수영과 김춘수의 시집들, 그리고 어릴 적 교과서에서만 보던 <진달래꽃> 초판본까지, 문학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책들이 유리 진열장 안에서 귀한 자태를 뽐낸다. 그 곁에는 일제강점기와 전후(戰後) 시대를 통과한 어린이 잡지, 초판 교과서, 오래된 신문과 잡지가 나란히 놓여 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평범한 문고본처럼 보이지만, 한국 대중 출판사의 한 단면을 이뤘던 잡지와 단행본 초판본이 빽빽하게 서가를 채운다. 손이 닿는 곳마다 ‘이런 게 아직 남아 있었나’ 싶은 책들이 튀어나온다. 무엇보다 이곳의 책이 특별한 이유는 대부분 ‘초판본’ 혹은 ‘창간호’라는 점, 그리고 이 모든 책이 공공기관 소장이 아니라 한 개인이 30여 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모은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겉모습만 보면 마치 출판사 전시장이나 박물관 같지만, 유리 진열장 안 일부 ‘비매품’을 제외하면 서가에 꽂힌 책들은 모두 구매 가능하다. 그래서 이곳에는 특정 작가의 초판본을 찾는 수집가, 특정 분야 잡지의 창간호를 노리는 ‘책 사냥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처음책방을 소개하는 간판의 문구

초판본에 빠진 책방지기의 30년 수집기

처음책방의 시작은 책방지기인 김기태 세명대학교 미디어 콘텐츠창작학과 교수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생소하던 저작권을 공부한 덕분에 전국 각지에서 강의를 맡게 됐고, 공강 시간만 생기면 어김없이 그 지역 헌책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내가 만든 책이 헌책방에 나와 있는지 궁금해서 갔어요. 그러다 우연히 잡지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발견하면서 완전히 빠져버렸죠.”
그때부터 그의 관심은 ‘그냥 오래된 책’이 아니라 ‘어떤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던 순간’으로 옮겨 갔다. 유명 작가의 초판본, 문제작이 실린 문학잡지, 각종 정기간행물의 창간호 목록을 머릿속에 그려두고, 전국 강의 스케줄을 서점 지도처럼 겹쳐 보는 날이 늘어났다.
희귀한 초판본을 발견하면 한 달 월급을 털어 겨우 한 권을 들여 오기도 했다. 차가 없던 시절이라 지방 헌책방에서 한꺼번에 다 가져올 수 없을 때는 지인 집에 책을 맡겨 두었다. 그렇게 30여 년이 흘렀고, 지인 집에는 더 이상 책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귀한 책들을 그대로 쌓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재직 중인 세명대 근처에 일단 모아두었다. 그러던 2024년, 교수 겸직이 가능해지면서 이천시 모가면에 ‘처음책방’을 열었다. 단행본 초판본만 5만여 종, 정기간행물 창간호 1만5,000종 이상이었다. 책을 옮기는 데만 5톤 트럭 12대가 움직였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들

한국의 전설적인 투수 선동열과 최동원이 표지를 장식한 <주간야구> 창간호가 눈에 띈다.

책방에서 이어질 앞으로의 시간

이제 처음책방은 초판본과 창간호를 소장·판매하는 공간을 넘어 ‘문학과 출판의 현재를 환기하는 전시장’ 같은 공간이 되었다. 개관 이후 지금까지 이미 세 차례 전시를 진행했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 준다. 현재 전시 중인 <우리 베스트셀러의 원형, 딱지본1)을 만나다>에서는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딱지본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금방울전>과 <홍길동전> 같은 고전소설 딱지본은 화려한 채색의 표지와 함께 한국 상업 출판 표지 디자인의 뿌리이자 대중문학의 초기 베스트셀러 역사를 보여 주는 자료로 소개되고 있다.
책방에서는 전시뿐 아니라 필사 백일장, 시월회, 작가와의 만남, 독서 토론 모임 등 다양한 행사가 활발히 개최되고 있는데, 모든 행사 스케줄은 처음책방 블로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책방지기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책방을 놀이터 삼아 하루 대부분을 책 사이에서 보낸다. 교수 정년 퇴임까지 3년을 앞두고 있는 그는 이후에는 책방 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서울국제도서전’ 출품 등 더 큰 무대에 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남은 꿈은 분명하다. 초판본과 창간호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데이터베이스화해 훗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
논과 목장이 둘러싼 조용한 마을 한가운데에서 처음책방은 오늘도 ‘처음의 마음’을 품은 책들을 조용히 펼쳐 보이고 있다. 그 사이를 천천히 걷는 이들의 손에는 언젠가 누군가의 첫 책이 되었을지 모를 한 권이 새로이 들려 있다.
1) 딱지본: 국문 소설류를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행한 것을 이르는 말.
표지가 아이들 놀이의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되어 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우연히 잡지 <뿌리깊은 나무> 창간호를 발견하면서 완전히 빠져버렸죠.” 그의 관심은 ‘그냥 오래된 책’이 아니라 ‘어떤 책이 처음 세상에 나왔던 순간’으로 옮겨 갔다.

다양하게 모여 있는 문학·예술 잡지 창간호

Info.


Tip.

처음책방 책방지기 김기태 교수의 추천 도서 3선

위대한 유랑
샤녠셩 | 처음책방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백범 김구의 중국 망명기. 백범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을 다룬 책으로, 김신 장군의 도움 덕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도왜실기
김구 | 국제문화협회

1932년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의 의열 활동을 정리해 중국어로 저술한 역사서다. 처음책방에는 1946년 엄항섭이 한글로 번역·간행한 국내 최초 판본이 있다.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 춘조사

‘풀’의 시인이라 불리는 김수영은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 시인의 생전 유일 시집으로, 처음책방에서 만날 수 있다.

※ 책 소개는 각 출판사 서평을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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