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춤을, 글을 좋아하면 꾸준히 해볼 것.
-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 엄청난 기회들이 올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화가
김형희- 꿈, 도전, 그리고 사랑이 자신을 화가로 만들었다 말하는 여성이 있다. 사고 후 척수장애인이 된 그는 무용수에서 화가로, 공연기획자로 변신해왔다. 2021년에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최연소 여성 이사장으로 취임한 김형희를 만난다.
- 구술 내용 요약
- 사고 후 작품활동, 임신과 출산, 임상미술치료사,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뮤지컬 비상,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 취임
- 키워드
- 화가, 장애예술인,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임상미술치료, 여성장애인
대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김형희는 성균관대학교 무용과에 입학하며 안양으로 이사했다. 무용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가 막 시작한 초봄의 어느 날, 김형희는 교통사고로 척수를 다쳐 전신마비 장애를 갖게 된다. 손가락 하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없는 최중증 장애인이 되었고, 삶은 송두리째 바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약을 먹을 수도 없고 손목을 그을 수도 없고. 부모님이 직장을 다 그만두면서 간병을 시작했어요. 특히 아버지는 제 손발이 되어 아침부터 밤 10~11시까지 재활운동을 도와주셨고, 저를 다시 한번 무대에 세우고 싶어 하셨어요. 아버지의 눈빛과 그 얼굴을 보니까 너무나 간절하신 게 느껴졌어요. 나는 밤마다 죽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 아빠는 나를 어떻게라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제 인생을, 또 다른 삶을 살아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고쳐먹었죠.”
전신마비 장애인이 그림을 그리면 팔 힘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초등학교 이후로 그림을 그려 본 적 없던 김형희는 손목에 붕대로 붓을 묶고 하루에 10분, 20분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휠체어로 접근할 수 있는 학원이 없으니, 오로지 독학이었다. 혼자 무용잡지를 펼쳐놓고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렸다. 하루에 한 시간, 두 시간, 그리는 시간이 점점 늘면서 어깨에 힘이 생기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에도 작은 희망의 씨앗이 생겼다. 그렇게 10년.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재활과 작품 활동에 집중했고 2002년이 되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회 타이틀은 ‘움직임의 자유 찾기’. 작품 안에서 또 다른 내가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고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작품은 제 심리와 몸 상태가 많이 반영된 느낌이 있어요. 형태적인 것보다는 색상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무용수들이지만 피부색이 보라나 초록색이거나, 그로테스크한 느낌의 여인들을 많이 그렸어요. 우울함이나 절망감 같은 제 심리적인 색깔들이 작품에 반영이 됐다고 생각해요. 이후 사회에 나와 외부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한 명을 그리던 제가 여러 명을 그리기도 하고, 색깔이 밝아지고 또 핑크 계열을 많이 쓰기도 하고요. 제 작품의 주된 소재는 여인, 움직임에 대한 것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김형희의 작품에 분홍색 계열의 색상이 등장하게 된 건 한 남자를 만나게 된 시기와도 겹친다. 사회복지학과 학생으로 자원봉사를 왔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 5년 연애 후 결혼한다. 하지만 이후 항생제 부작용인 스티븐스-존슨병이 찾아왔고, 임신과 출산 이후에는 큰 우울을 겪기도 했다. 나는 나 자신이 치료해야 했다. 그가 임상미술치료 공부를 시작한 계기다.
“매주 토요일 아침 9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학교에 가서 임상미술치료사 2급 자격증 수업을 들었어요. 치유도 많이 됐고 공부가 굉장히 재미있더라고요. 곧바로 1급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차의과대학교 통합의학대학원에 입학했습니다. 의과대학 수업이다 보니 병원에서 임상을 3천 시간 해야 해요. 국립재활원, 장애인자립센터, 정신병원, 교도소 등을 돌면서 인턴을 했고 30~40대의 젊은 척수손상 환자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많은 경우 교통사고나 스포츠 사고에 의해 중도 장애인이 되었고, 그들 내면의 분노와 절망에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임상미술치료가 척수손상 환자의 우울감 감소와 재활동기 향상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을 쓰게 되었는데, 세계적으로도 처음 다뤄진 연구주제에요.”
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들의 심리적 고통을 연구한 김형희는 장애인의 사회적인 활동을 돕는 작은 모임이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안양에 작은 사무실을 마련해 정부 지원사업을 적극적으로 찾아다녔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예산 800만원을 받아 한국장애인예술표현연대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 장애인 화가 만들기’ 사업은 집에서만 생활하는 여성 장애인들이 처음으로 미술 자료를 접하고 그림 그리기를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마련했다. 5년간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데뷔해 활동하고 있다. 김형희의 관심은 미술을 넘어 다시 무용으로, 음악으로, 그리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모든 예술은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세 여성 장애인의 이야기를 그린 음악극을 시작으로 회화와 미디어아트를 결합한 실험적인 작품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간의 작품들을 종합해 만든 뮤지컬이 <비상>이에요. 2017년에 초연해 3회 연속 매진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죠. 세 인물 중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된 캐릭터는 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어요. 훈련 후유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캐릭터, 소아마비 장애인으로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캐릭터 모두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죠. 비장애인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작은 예산에도 공연에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셨어요. 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많은 관객에 울림을 주는 경험이었어요.”
장애인문화예술원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장애인 지원사업을 이관해 설립한 공공기관이다. 2021년, 김형희는 장애인문화예술원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경력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장애인이 예술가가 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업들을 개발하고 비장애인 직원들도 장애 당사자의 시각에서 문화예술 관련 업무 전문성을 키울 수 있게 되길 바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예술을 매개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사라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등록된 장애예술인의 29%가 경기도에 거주하고 있어요. 관련 단체도 32개가 있죠. 다른 지자체와 비교했을 때 큰 요구가 있음에도 예산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항상 있죠. 이사장으로서 이와 관련해서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등과 다방면으로 소통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업이나 행사 인원의 50% 이상을 장애인이 전담하는 것, 장애예술인에 대한 연구사업, 전시·공연·교육 현장에서의 배리어프리 매뉴얼 제작, 장애인 특화형 예술강사 교육 등의 사업을 운영하면서 제가 장애예술인으로서 겪은 어려움과 부조리에 대해 조금 더 목소리를 내고자 합니다.”
무용에 대한 사랑을 시작으로 종합예술인으로 성장한 김형희. 장애를 얻고 활동 30년 차에 접어든 그는 장애예술인 당사자로서, 동료예술인을 지원하며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는 공공기관장으로서 남은 임기를 치열하게 보내고자 한다.
“20년 후에는 아마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집에서 그림 그리면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했던 모든 일이 우리 사회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다 필요했던 거다, 그 일을 한 모든 사람들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그들이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놨구나, 라고 평가되면 좋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