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의 평범한 학교에서
  • 아이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고,
  • 그간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왔죠."

과학 교사

강선화
  • 농촌지역의 평범한 학교를 전국에서 가장 성공한
  • 과학중점학교로 만든 유능한 교사가 있다. 대학원에서
  • 유기금속화학을 전공하고, 나이 마흔에 과학교사가
  • 되어 많은 학생들의 꿈을 함께한 강선화를 만난다.
구술 내용 요약

유년시절, 포항공대 석사, 기업 연구원 재직 시절, 경기도 영재교육, 시흥매화고등학교 재직 시절, 과학중점학교 운영
키워드

과학교사, 과학중점학교, STEAM교육, 시흥매화고, 부천중원고
산골에서 나고 자란 소녀,대학에서 과학자의 꿈을 꾸다 산골에서 나고 자란 소녀,대학에서 과학자의 꿈을 꾸다

강선화는 산골에서 나고 자랐다. 지리산 중산리에서 8km 정도 떨어진 작은 동네. 도시로 오게 된 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다. 본가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진주에서 혼자 자취를 했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1986년, 경상대학교 사범대학에 진학한 그는 들어가서 두 달 만에 민주화운동을 경험한다. 한 학기에 두 달 강의를 들을까 말까였다던 80년대 대학생활 동안 강선화는 공부에 대한 더 큰 갈증을 느끼고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포항제철에서 포항공대를 설립했어요. 포항공대는 유일한 선택지였어요.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는데) 학비에 생활비까지 지원해줬거든요. 1차로 영어시험을 보고 2차로 구술 면접을 본 뒤에 합격했어요. 교수님, 대학원생 전부 다 서울 사람들에 정말 잘난 사람들이었어요. 완전히 시골 촌놈인 저는 운이 좋았죠.”

대학원에서 유기금속화학을 전공한 강선화는 박사 진학을 두고 고민했다. 유학을 다녀온 여성 과학자들도 한국에 돌아오면 취업에서부터 차별을 받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정 형편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했다. 고민 끝에 취업을 선택한 그는 현대전자에서 1년, 한효과학기술원에서 4년, 그리고 태평양기술연구원(현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에서 4년, 도합 9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과학계 여성 연구원이자 직장인으로 살았던 시절이다.

“현대전자반도체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40명의 연구원 중 저 혼자 여자였어요. 저는 화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에서 소재를 개발하는 연구를 할 거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당시 현실은 외국 제품을 위탁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죠. 게다가 여직원인 저는 남직원 월급의 80%를 받았어요. 동일한 노동을 하고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는 거는 사람 사는 기본 문제죠. 이후 이직한 태평양기술연구원은 화장품 회사다 보니까 여직원들을 훨씬 더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남직원 월급의 90% 기조는 유지되고 있었죠. 저는 이런 차별까지 감수하면서 이직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항의했고, 동일한 임금을 받기로 회사와 이야기할 수 있었죠.”

현재 강선화가 근무하고 있는 부천 중원고등학교 화학실험실
퇴사 후, 나이 마흔에 시작된 교사의 길 퇴사 후, 나이 마흔에 시작된 교사의 길

회사에서 항염증제 연구를 하던 강선화는 더 이상 일을 지속하기 힘들 만큼 급격한 건강 악화를 경험했다. 난소암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그 자신과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퇴사를 결심해야 했다. 경력 단절 시기, 강선화는 두 자녀를 키우면서도 계속 일하고 싶었다. 사범대를 졸업한 지 15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임용고시를 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해였다. 그렇게 나이 마흔, 강선화는 안산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영재교육이 붐이 한창일 때예요. 장학사한테 연락이 왔어요. 영재교육을 하는 교사들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대학원까지 나온 제게 제안이 온 거죠. 그렇게 안산교육청과 경기도융합과학교육원에서 주관하는 영재수업을 진행했어요. 주로 방과 후 아니면 주말에요. 영재수업을 해보니 정말 좋았어요. 똑똑한 아이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할 수 있었죠. 해외 연수의 기회도 자주 찾아왔던 것 같아요. STEAM(사이언스(S), 테크놀로지(T), 엔지니어링(E), 아트(A), 매스매틱스(M)) 교사연구회에서 우수교사로 선정되어서 미국 연수도 갔어요. 덕분에 과학 교육에 관한 책도 쓸 수 있었죠.”

2009년, 교육부가 과학중점학교 사업을 시작하면서 과학교사 강선화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졌다. 그중 하나가 시흥매화고등학교였다. 당시 개교 3년 차였던 시흥매화고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의 학교였다. 지역 특성상 학교 간의 거리가 먼 탓에 평준화가 어렵고 부모의 소득 수준이 낮은 학생들의 비율도 높았다. 그러나 강선화가 주목했던 지점은, 학생들 대부분이 학원에 가는 대신에 학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시흥매화고에서 과학중점학교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로 학교를 살릴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과학동아리를 만들어서 굉장히 열정적으로 운영했어요. 학생들에게 '아침에 8시까지 학교 와라. 저녁엔 끝까지 남아라.'라고 했어요. 방학 때도 나와서 연구를 시켰어요. 과학은 실험을 통해 직접 보는 게 중요해요. 이론적으로 분명히 이래야 하는데 실험에서는 그렇게 안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 그다음에 인터넷 찾아보고 분석해 보는 거죠. 개구리가 뜨거운 물에 넣으면 뛰어 올라오지만, 물을 천천히 데우면 거기가 자기 세상인 줄 알고 결국은 삶아진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저는 애들이 못 튀어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연구와 대회를 통해서 ‘아, 선생님 저희 과학고도 이겼어요.’ 막 이런 얘기도 할 수 있게 하고. 자신감을 주고 싶었죠.”

2012년 경기도교육나눔박람회에서 부스 운영중인 지도학생들
2016년 과학중점학교 사례를 발표하는 강선화
2016년 화학탐구프런티어페스티벌에서 은상을 수상한 시흥매화고 나흐코삼팀과 강선화
2013년 시흥매화고 교내 프로젝트 발표대회를 마치고 학생들과
여학생, 남학생 상관없이 과학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어요 여학생, 남학생 상관없이 과학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어요 여학생, 남학생 상관없이 과학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어요

시흥매화고등학교에서의 9년은 강선화의 경력에서 가장 보람되고 빛나는 시간이었다. 특목고 등에서 수월성 교육을 받은 학생들에 밀려 모든 대회에서 나가떨어지던 시기도 있었다. 그럴수록 강선화와 학생들은 여러 대회의 문을 두드렸다. 전국구 학생들이 경쟁하는 대표적인 두 대회, 한화사이언스챌린지와 화학탐구프런티어페스티벌에서 시흥매화고 학생들이 입상하기 시작했다. 기술창업올림피아드에서도 2년 연속 동상, 대상을 수상하며 시흥매화고는 가장 성공한 과학중점학교의 사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강선화는 이를 계기로 과학의 길을 걷게 된 제자들을 자랑스럽다 말한다.

“구석진 시골이라고 여겨질 법한 학교였는데도 학생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고, 이 아이들에게는 그간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왔죠. 광주과기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제자도 있고, 울산과기대에 진학한 제자도 있어요. 여학생, 남학생 상관없이 과학을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어요. 공립학교에서는 원래 5년이면 나가야 하는데, 동아리 애들이 마음에 걸려서 매번 연장을 했어요, 그렇게 9년. 가능한 최대 기간을 채웠으니 제 교직 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여전히 정말 큰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죠.”

이후, 목감고등학교를 거쳐 지금의 중원고등학교에 재직하게 된 강선화는 퇴직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이끌던 중원고에서의 과학중점학교 프로그램을 잘 운영하면서 후배 교사들에게 이를 물려주고 떠나는 것이 목표다. 10년의 회사생활과 20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 강선화가 후배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이제는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것, 나만의 것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한 시대잖아요. 학생도, 교사도 마찬가지예요. 교사라면 수업을 지도하는 것은 기본이에요. 하지만 수업 지도 하나만을 가지고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없거든요. 수업은 다 똑같이 하니까. 그렇다면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말을 할 수 있는 특색이나 지도방법론을 가지고 있으면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