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자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신이 청계천을 갔을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아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청계천
판자촌에 가보기로 마음 먹고, 성수동에서부터 한참 길을 걸어
올라선 언덕에서 판자촌의 전경을 보게 된다.
“언덕을 하나 넘고 또 레일을 하나 건너고 다시 언덕을 넘어서,
그러니까 한참 가야 하는 곳이었죠. 땅도 질고. 그런 곳을 넘어서
갔는데, 그 언덕 위에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는데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당시 73년이었거든요. 이쪽 끝에서 답십리까지 가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어요. 1시간 40분 동안의 길에 양쪽으로 끝이
없이 판자촌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전부 판자의 루핑을 얹은
곳이었고. 나중에 들어가서 보니까 담도 거적이고, 현관문도
거적이에요. 들추면 바닥도 그냥 그대로 가마니를 깔고 있었고.
그리고 결핵 환자가 굉장히 많았어요. 물이 나오는 날 물을 받기
위해서 100m, 200m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물을 여러 통 받아갈
수가 없는 거죠. 한 통씩 두 통씩밖에 못 받아가서 그걸 며칠씩
쓰고.”
청계천 판자촌을 알게 된 그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사는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계속해서 그곳을 다니게 되었다. 방을 하나 얻어 같은 대학의
학생들과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한글과 공부를 가르치며, 독일 교회에서 100명분의 식량을 지원
받아 3~400명이 먹을 식량으로 불리곤 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함께하던 그는 75년에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때는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에요. 주민들은
거기서 흩어져서 강제 철거하니까 나가야 됐어요. 그런데 그 협상
과정에서 교회는 많은 것을 받아 가지고 나가게 되더라고요.
주민은 어딘가에 가서 가난하게 사는데, 그곳에서 한때 함께 했던
교회는 어딘가에 가서 자리를 잡고. 이런 걸 보면서 이게 옳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우리가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다가
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사람들과 같이 살아보면서, 정말 이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좀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