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신명자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이사장

신명자

힘든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고민해보자, 그리고 함께 하자, 그게 저의 답이었어요

  • 1970년대 서울의 빈민촌. 그곳 주민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가난하고 어려운 삶을
  • 함께 살아낸 여성이 있다. 1973년, 대학생이었던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판자촌이
  • 늘어서 있는 풍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 “제가 그 끝까지 걸어나오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우리는 어떻게 이런 가난이
  • 함께 이 사회에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 상상하지 못했던 가난을 마주한 그는 그 풍경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난을 겪는
  • 이웃과 함께 살면서, 판자촌의 주민들과 삶을 나누면서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했다.
  • 그 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 ‘주민들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의
  • 역할이었다’라고 회상한 그는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의 신명자 이사장이다.
구술내용요약
유년기, 대학 시절, 청계천 판자촌에서의 야학활동, 양평동 판자촌 사랑방, 제정구와의 결혼생활, 경기도 시흥에서의 마을 건축 사업, 생명력 있는 공동체, 앞으로의 계획
키워드
  • 주민자치
  • 마을공동체
  • 제정구
  • 청계천
  • 함석헌
  • 정일우 신부
  • 김수환 추기경
  • 독일 미제레올(misereor)
  • 복음자리마을
  • 한독마을
  • 목화마을
  • 시흥

국문과 대학생, 판자촌을 만나다

“어린 시절은 그냥 어렵지 않은 가정, 유복한 가정에서 잘 자랐다고 할 수 있겠네요.”
신명자의 고향은 전라남도 광주다. 그는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사회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다.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문제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는 그는 숙명여자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서울로 와서 제가 가장 가깝게 만났던 분이 함석헌 선생님이세요. 장자 강의를 들으면서 세상에 대해서 눈을 많이 뜨게 됐고,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흡수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와 시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가 어떤 의식이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청계천을 만나게 되었어요.”
신명자는 문학 강좌를 듣다가 청계천이 복개되었고, 그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알고 지내던 활빈교회의 김진홍 목사가 그에게 그곳 주민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16살 산모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아이를 낳다가, 산욕열 때문에 생사를 오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병원 가는 게 하늘의 별따기이던 시절이에요. 어려운 사람들은 대개 시립병원을 갈 수 있었는데, 이 친구를 업고 세 군데 시립병원을 다니다가 네 군데째 남부 시립병원에서 받아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당시 시립병원에서 받아주는 건 그냥 누울 자리를 줬을 뿐이고, 모든 약과 치료제는 본인이 사와야 되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청계천이 헌책 사러 다니는 곳이라는 것밖에는 없는데, 도대체 청계천이라는 데가 어떤 곳인지 잘 이해가 안 됐어요. 그래서 그 아이를 만나러 갔고 제 용돈을 다 털어서 페니실린을 샀어요. 그 애는 16살이니까 피부가 뽀송뽀송한 게 복숭아빛으로, 작은 솜털도 그대로 있는 애기였어요. 애기인데 눈밑이 새까만 게 이미 죽음이 가까이 왔었고. 사흘 만에 죽었어요.”
양평동 판자촌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양평동 판자촌 '예수회 복음자리' 사랑방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신명자는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자신이 청계천을 갔을까 생각해보게 된다고 했다. 아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청계천 판자촌에 가보기로 마음 먹고, 성수동에서부터 한참 길을 걸어 올라선 언덕에서 판자촌의 전경을 보게 된다.
“언덕을 하나 넘고 또 레일을 하나 건너고 다시 언덕을 넘어서, 그러니까 한참 가야 하는 곳이었죠. 땅도 질고. 그런 곳을 넘어서 갔는데, 그 언덕 위에 올라가서 앞을 바라보는데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당시 73년이었거든요. 이쪽 끝에서 답십리까지 가는 데 1시간 40분이 걸렸어요. 1시간 40분 동안의 길에 양쪽으로 끝이 없이 판자촌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전부 판자의 루핑을 얹은 곳이었고. 나중에 들어가서 보니까 담도 거적이고, 현관문도 거적이에요. 들추면 바닥도 그냥 그대로 가마니를 깔고 있었고. 그리고 결핵 환자가 굉장히 많았어요. 물이 나오는 날 물을 받기 위해서 100m, 200m 줄을 서 있을 정도로. 물을 여러 통 받아갈 수가 없는 거죠. 한 통씩 두 통씩밖에 못 받아가서 그걸 며칠씩 쓰고.”
청계천 판자촌을 알게 된 그는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사는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품고 계속해서 그곳을 다니게 되었다. 방을 하나 얻어 같은 대학의 학생들과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공장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한글과 공부를 가르치며, 독일 교회에서 100명분의 식량을 지원 받아 3~400명이 먹을 식량으로 불리곤 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함께하던 그는 75년에 청계천 판자촌이 철거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때는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에요. 주민들은 거기서 흩어져서 강제 철거하니까 나가야 됐어요. 그런데 그 협상 과정에서 교회는 많은 것을 받아 가지고 나가게 되더라고요. 주민은 어딘가에 가서 가난하게 사는데, 그곳에서 한때 함께 했던 교회는 어딘가에 가서 자리를 잡고. 이런 걸 보면서 이게 옳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우리가 그들이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갖다가 주려고 하는 게 아닌가. 그 사람들과 같이 살아보면서, 정말 이 사람들과 같이 갈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좀 찾아보자.”

신명자는 당시 청계천에서 야학활동을 하던 제정구 선생,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빈민 지역을 찾다가 양평동을 발견했다. 김포가도에서부터 문래동까지, 안양천변을 따라 2만 세대가 밀집해 있던 빈민촌에 들어간 때가 1975년 11월이었다. 76년 2월에 그와 제정구 선생, 정일우 신부가 양평동 판자촌에서 동네 사랑방인 ‘예수회 복음자리’를 열었고, 신명자는 그 해 4월에 제정구 선생과 결혼했다.
“그전에는 청계천이든 양평동이든, 저희한테는 일터처럼 왔다 갔다 하는 곳이었죠. 그런데 거기에 살게 됐잖아요. 결혼을 해서. 밤이면 집으로 돌아갔는데 복음자리 사랑방이 5평, 저희 집이 3평 조금 넘나 그랬어요. 방은 세 개였는데 정 신부님은 혼자 누우면 딱 알맞고, 제 선생님하고 저하고는 둘이 누우면 딱 알맞고. 큰 애를 거기서 낳았는데 애를 눕히니까 모로 누워야 되는 정도였어요. 그 집이 길가의 코너 집인데 판자로 돼 있었다고 했잖아요. 12시까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길바닥에 누워 있는 것 같은 거예요. 12시까지 잠을 잘 수가 없어. 조금 지나 잠이 너무 오니까, 길바닥에 누워 있는지 어딘지 모르고 잘 자더라고요. 일터인 것과 사는 것하고가 얼마나 다른지. 삶을 나눈다, 삶을 함께 한다, 아, 이것부터 시작이구나. 어려운 사람들과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고, 어깨를 붙잡고 같이 갈 수 있는 건 함께 사는 것부터 시작이구나. 제 선생님이랑 신부님이 같이 살아보자 이게 얼마나 맞는 얘기인가.”
복음자리 마을 공사현장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마을에서 사랑방을 열다

그는 단단히 각오하고 양평동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신명자의 남편이자 동지인 제정구 선생은 어렵게 살고 있는 이웃 주민들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머무르는 집, 입는 옷, 먹는 음식을 판자촌 주민들과 같이 하는 것이 최소한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데, 함께 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진짜 어렵구나. 주민들이 볼 때는 제가 거기 갔는데, ‘허여멀건한 여자는 여기 왜 왔어?’ 주민들이 이 생각을 하는 게, 저는 학교만 다니고 그랬으니까 하얗잖아요. 그분들이 볼 때 저희가 너무 이방인인 거예요. 도저히 동질감이 생기기가 어려운. 제가 아무리 티셔츠만 입고 바지만 입고 지내도, 그 사람들한테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는. 그 속에서 함께라는 게 참으로 어려운 거였던 것 같아요. 그 세월을 계속 같이 지내니까, 우리 큰애가 아름인데, 동네 사람들은 저 다 아름이 엄마라고 하고, 늘 같이 먹을 것도 해먹고 같이 놀고 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지금도 아름이 엄마가 더 편한, 그런 게 된 거죠.”
신명자는 사랑방에서 유치원을 열어 판자촌 아이들을 돌보며 그곳의 주민으로 살았다. 유치원을 열게 된 계기도, 사랑방으로 주민들을 초대하면서 함께 지내다 보니 아이들을 돌봐달라는 부탁이 있어 시작한 거였다. 그는 주민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마음 나누는 일을 잘하고 좋아했다. 1977년에 철거 계고장이 나온 뒤, 판자촌의 170세대와 함께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으로 이사해 복음자리 마을을 짓게 된 것도 주민들과 이야기해 내놓은 결정이다.
“주민들하고 계속 얘기를 했어요. 매일 모여서, 그러면 우리가 하고 싶은 건 뭐냐. 내 집에서 살고 싶다. 남의 집 그만 돌아다니고 싶다. 방 한 칸이라도 좋으니 내가 발 뻗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 지금은 주거권에 대한 것들을 우리의 권리라고 얘기하잖아요. 그 당시에는 주거권을 권리라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주거복지라고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주거복지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길거리에 나앉아도 정부가 1원도 보조하지 않을 때였죠. 그래서 논의한 게, 발 뻗고 어딘가 누울 수 있는, 작은 평수라도 방 하나라도 지어서 이사 가는 거를 생각해보자.”
‘주민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함께하는 것. 지나치게 개입해서 주민의 힘이 없어지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주민의 힘이 생기도록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그가 강조한 핵심 가치였다. 양평동 판자촌 주민들과 집단 이주를 결정하고 나니, 이주할 땅을 사고 마을 지을 돈이 필요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도움을 받아 정일우 신부가 독일의 비영리 천주교 구호단체 미제레올(Misereor)에 도움을 요청했고, 지원 받은 금액으로 시흥시에 마을 지을 땅을 샀다. 1977년 시흥으로 이주한 주민들이 평당 7천 원의 비용을 지불해 집을 지은 복음자리 마을은 그렇게 세워졌다.

시흥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세운 마을

복음자리 마을을 세운 후에도 한독마을, 목화마을을 연이어 시흥시에 세우며 철거 이주민들은 스스로 집을 짓고 동네를 가꾸어나갔다. 그 과정을 지켜본 신명자는 자신들의 힘으로 집을 짓고, 스스로 일할 곳을 찾아 의식주를 해결해낸 주민들이 위대하다고 말한다.
“복음자리 집을 지을 때는 땅을 메꾸고 고르는 걸 다 손으로 해야 했어요. 영등포구청에서 삽이랑 리어카랑 다 빌려줘서 그걸 갖고 이렇게 했는데. 주민들이 여자나 남자나 다 똑같이 일을 했어요. 왜냐하면 남자들, 옛날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성들이 더 일을 많이 하고 남자들이 일을 더 안 하고 그런 게 많았죠. 여성들은 공장에 다니고 그랬거든요. 근데 다 똑같이 품앗이로 집을 지은 거예요. 말하자면 나는 공장에, 회사에 나가. 회사에 나가기 때문에 그날 일을 할 수 없어. 근데 땅을 메꾸는 데 몇 품이 들어갔어. 그러면 그걸 다 나누는 거죠. 나누어서 회사에 다니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이 일을 한 사람들에게 돈을 줬어요. 일을 다니시는 분들은 다른 데서 벌어서 돈으로 그걸 내고, 나머지 근로 능력이 있는 분들은 여기서 일을 해서 그 돈으로 집 짓는 돈을 다같이 상쇄해서. 다 끝났을 때 굉장히 많은 돈을 다 갚았어요. 놀랍죠.”
복음자리 마을 공사현장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주민들 안에는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술자들이 있었다. 전기 공사 등 외부에서 인력을 데려오는 일도 있었지만, 주민들에게 스스로 마을을 건축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마을 밖에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품앗이를 통해 비용을 지불하면서 빠른 속도로 집값을 갚았다. 하지만 집을 짓고 난 다음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있었다. 주민들의 경제활동이었다. 신명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저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이 허허벌판에 뭘 먹고 살까, 이게 가장 큰 일이었죠. 공장도 몇 개 없고 다 어디로 나갈 수는 없는데 도대체 이 사람들이 뭘 먹고 살까. 그걸 너무 걱정을 했는데, 동네 사람들은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밭에 가서 일하고 있고 봄이 되니까 논에 벼, 모 심으러 다 갔어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동네가 다 저기 바닷가에 가서 밤새도록 횃불 켜고 망둥이며 조개며 잡아와가지고 아침에 끓이고 있는 거예요. 저는 거기에 망둥이가 있는 줄도 모르죠. 주민들은 돌아다니면서 다 알고, 밭에 가서 일해서 돈을 벌어오고. 어떻게 해서든 취직을 하고 다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완공된 복음자리 마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그러면서도 그는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나갔다. 마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시작한 장학회, 생필품 공동구매를 하다가 확대된 신용협동조합이 주민들의 힘으로 운영됐고, 마을 수녀들과 함께 공동체 사람들의 음식을 만들면서 복음자리의 이름으로 잼을 판매하기도 했다. 신명자는 주민들의 자립 덕분에 독일 미제레올에서 지원 받은 금액을 모두 갚았다며, 이렇게 계속 마을을 만들어 간 곳은 복음자리마을이 유일하다고 했다.
“돈은 한 번 가져왔어요. 한 번 가져온 돈으로 마을을 세 개를 만든 거죠. 한 번 가져온 돈을 주민들이 다 갚았어. 그 돈을 가지고 두 번째 마을을 만들었어요. 땅을 사고 그다음에 그걸 다 갚으셨어. 그래서 그 돈을 가지고 세 번째 마을을 만들었고, 그걸 또 다 갚으셨어. 그러니까 종잣돈 하나를 가지고 계속 마을을 만들어 갔던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한 곳이 세계에 하나도 없어요. 주민들이 위대한 거죠. 진짜 한 명도 안 빼고 다 갚았어요. 계속 함께 교육하고 얘기하면서 제 선생님이 우리는 거지가 아니다, 그 돈을 안 내는 순간 우리는 거지로 바뀌는 거다,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 그래서 다 갚았죠.”
복음신용협동조합 회관 기공식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생명력 있는 공동체 사회를 위해

1996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가 설립된 후, 초대 이사장이었던 제정구 선생이 99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신명자에게 제정구 선생은 남편이자 서로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의논했던 평생의 동지였다. 그는 ‘지금까지는 나랑 같이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과 같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라는 제정구 선생의 유언을 기억한다.
“제가 뛰어난 조직가이기는 해요. 주민들을 만나서 같은 눈높이로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그 사람들에게 동화되고 함께 하는, 이런 것들을 잘하니까 주민들 만나는 건 굉장히 좋은데. 제가 책임을 짊어지고 가는 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제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근데 제 선생님 가시면서 정 신부님이 저희랑 같이 계속 계시다가, ‘어떡하냐. 복음자리는 아름이 엄마가 해야지 누가 하냐. 너한테 놔두고 나는 간다’ 이러고 가버리셨어요. 신부님은 이 일이 없으면 제가 힘이 없어서 못 살 거라고도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큰 숙제를 주고 가면 쟤는 틀림없이 엄청나게 키워놓을 거다, 그래서 저한테 두고 가셨고.”
신명자는 제정구 선생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매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결정했던 많은 일들을 제정구 선생 없이 하려니 빈자리가 버거웠던 탓이다. 약 5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점차 기운을 차렸고, 제정구 선생과 함께 무언가를 하고자 했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구술자 뒤로 보이는 제정구 선생, 정일우 신부 사진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 사무실이 위치한 작은자리종합사회복지관
“이미 주민으로서 그냥 사는 건 할 수 없는 사회로 변했어요. 동네 사람들도 아파트로 다 들어갔고, 저도 그 옆에 아파트로 갔고. 도대체 옛날에 우리가 지향했던 ‘그냥 함께 살아본다’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함께 사는 것을 그만할 것인가. 그것 때문에 몇 년 동안 굉장히 괴로웠었죠. 그만하고 나는 딴 데로 갈 것인가. 근데 계속 다시 들려오는 답은 ‘아니야. 너 많이 부족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자. 그리고 함께 하자.’ 그게 제가 받은 답이었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을 찾아가는 것. 가장 힘든 이웃들을 찾는 것. 그들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신명자가 실천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다. 이를 후배들과 함께 이야기해서, 모두가 같이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나가기를 바란다고도 말했다.
“지금 이웃을, 내 옆을 먼저 돌아보는 사회가 아니게 됐잖아요. 공동체가 없는 건 생명을 죽이는 사회인 거예요. 살아나고자 하는 것을 죽이는 사회이고. 공동체가 살아나려고 하면 먼저 내가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라고 보거든요. 가난한 마음이 돈이 없는 그런 건 아니라고 봐요. 내가 먼저 마음을 비우고 옆을 돌아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인 거죠. 살아있는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 이런 것들을 사람들이 배워가야 한다고. 우리 세대만 해도 그런 얘기를 참 많이 했던 세대예요. 그렇게 살고자 노력했던 세대고. 지금은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이 이상한 세대예요. 그런데도 그 얘기를 해야 하고, 그렇게 발전시켜 나가야 하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소모임들을 만들어가고, 그런 공동체들이 살아있는 공동체로 움직여갈 수 있는 사회로 변화시켜 가야죠. 그걸 우리가 해야 하는 거죠. 우리 다음 세대가 해야 하고.”
그는 공동체적 생명력을 사회에 불어넣기 위해, 앞으로도 이웃과 함께 살아가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