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혜정

김혜정

명지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김혜정

김혜정

건축 공간과 사람들의 생활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가장 빛나는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건축은 그 공간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 사람의 생활과 공간이 적절하게 잘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생활을 담아, 사람들의 생활이 건축공간 안에서 빛나고,
  • 그 공간과 하나가 될 때 가장 좋은 건축공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 한국여성으로는 미시간대학 최초의 건축학박사이며, 국내 건축학과 첫 여성교수,
  • 그리고 한국여성건설인협회를 설립한 초대 회장인 김혜정은 어린 시절부터
  • 아름다운 공간을 상상하며 건축의 꿈을 쌓아왔다. 그는 퇴임 후에도 건축에 관한
  • 저서를 기획하며 공간과 건축에 대한 애정을 여러 작업에 담아내려는 듯했다.
  •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캠퍼스에서 김혜정 명예교수를 만났다.
구술내용요약
어린 시절, 대학 시절, 유학 시절, 교수 생활, 한국여성건설인협회 설립,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 세미나, 동탄1신도시, 위례신도시, 미래의 도시, 건축가의 책임과 사명
키워드
  • 건축
  • 건축학
  • 명지대학교
  • 한국여성건설인협회
  • 사용자 참여디자인
  • 신도시 마스터플래너
  • 차이와차별
  • 숙녀와건축

운명처럼 쌓아온 건축의 꿈

어린 시절 김혜정은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할아버지댁 정원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상상하곤 했다. 가지각색의 바위가 정원을 둘러싸고, 빨간 장미 넝쿨이 피어있었다. 김혜정은 어린 시절을 가득 채운 이 공간을 “상상력의 옹달샘”이라 부른다. 그 옹달샘으로부터 어린 시절의 정체성, 자존심, 존재감, 그리고 자긍심이 탄생하고 자라났다. 김혜정은 어린 시절 만났던 건축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안고 평생의 열정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어릴 적에 저희 아버지께서 <라이프>지를 쭉 받아보셨어요. 사진에서 보는 세계 도시의 모습들, 그 당시에는 제가 가보지 못한, 갈 수도 없었던 세상의 사진들을 보고 다른 도시도 상상하고, 다른 공간도 상상하고, 다른 문화도 상상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라이프지를 기다렸어요.”
“저희 부친께서 제가 아마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때쯤, 돌만 몇 개 놓여 있는 굉장히 유명한 일본정원의 그림 엽서를 사다 주셨는데, 그 정원을 보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 엽서를 보고 공간이라는 것이 이렇게도 되는구나 라는 걸 어릴 때 아주 감동을 받고... 자라면서도 그 공간을 잊은 적이 없어요. 이후 대학을 선택할 때 ‘친구들하고는 뭔가 좀 다르게 살고 싶다’ 생각했죠.”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중정
공과대학 진학 당시, 건축학과 40명 중엔 세 명의 여학생이 있었고 두 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여학생들은 대학을 나오더라도 졸업 후엔 결혼하고 가정에 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한편 김혜정은 미국에서 학위를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결혼, 임신과 출산을 차례로 경험했다. 친정어머니가 한국에서 양육을 돕고, 김혜정 역시 육아를 위해 휴학을 하고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에 박사 학위를 딸 수 있었다. 그는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미시간대학 건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으로 박사를 한다는 것이 남성들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여성들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제가 혼자 박사를 했죠. 그때의 분위기는 미국에서 석사만 해도 한국에서 교수를 할 수 있었고 대부분이 박사 마지막 학기에 논문 디펜스를 하면서 한국 대학에서 콜을 받아놓는 상태였죠. 그런데 저는 몇 년 동안, 여기저기 아무리 지원을 해도 기회가 오지 않더라고요. 왜 그런지 몰랐는데, 당시에는 ‘공대는 여자 교수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 정도로 여자 교수를 뽑지 않는 시절이었어요.”
“제가 몇 년 동안 학교를 못 찾고 힘들어하니까 한 선배 교수가 제게 가정관리학과나 주생활학과에서 자리를 찾아보라고 할 정도였어요. 건축하고 가정 관리는 완전히 다른 분야인데도요. 그렇게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러 전공에서 강사 생활을 하던 중, 명지대학교에서 저를 선택해 주셨어요. 건축학과의 첫 여자 교수로 문을 열게 된거죠. 남자 교수님들보다는 더 잘 해야 되고, 모든 분야에서 앞서 나가면서 중간 정도도 하면 안 된다고, 책 잡히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어요. 내가 잘해야 후배들도 길이 열릴 것이고, 또 우리 딸들 세대도 문이 열릴 거라는 부담감도 가지고, 사명감도 가지면서 그렇게 27년 동안 쭉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여성들과 함께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를 논의하다

2001년, 여성부가 발족하면서 전문직 여성들의 목소리를 가시화하고 정책에 적용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김혜정은 이를 계기로 건설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1호’ 여성들과 만날 수 있었다. 교통기술사 1호, 설비기술사 1호, 구조기술사 1호 등이었다. 단지 여성이기 때문에 차별을 받고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경험을 공유하는 이들은 건설계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하고 더 많은 기회를 함께 모색하고자 ‘한국여성건설인협회’를 설립했다. 처음 아이디어가 나온 지 2주 만의 일이었다.
“협회를 설립하고 첫 번째 일이 건설 분야 여성 인력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었어요. 전국 대학에 건설 분야 전공 여학생이 몇 퍼센트가 되고, 민간의 설계사무소에는 여성 직원들이 얼마나 있는지. 조경, 교통, 토목, 구조, 설비 쪽에 활동하는 여성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기술과 역량을 갖춘 여성들이 많이 있는데 회사 안에서 승진을 할 때는 여성이기 때문에 유리천장이 있었어요. 외부의 힘이 뒷받침해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구조였죠. 협회에선 여성 임원 비율을 늘리는 회사에 인센티브를 주는 등의 정책을 여성부에 제안했고,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정말 결실이 있었어요.”
한국여성건설인협회 창립 1주년 기념세미나 자료 ⓒ한국여성건설인협회

여성들과 함께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를 논의하다

협회에서는 여성 인력 개인의 역량 강화 뿐 아니라, 남성들의 시각에서 만들어지고 평가되어온 건축과 도시 환경, 도시 구조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우리의 삶터에 여성들의 시각에서 제안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도시의 여성들이 불편해 하는 것을 개선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렇게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라는 주제를 제안하고 컨퍼런스를 시작했다. 여성 전용 주차, 임산부 전용 주차를 시작으로, 사업장의 여성 휴게 공간, 구두를 자주 신는 여성들을 위한 보도블록의 마감 재료 등 크고 작은 아이디어들을 상상하고 제안했다.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의 가장 큰 특성은 돌봄이에요. 즉,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가 되려면 아동에게 안전하며 고령자들에게도 친화적인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적, 공적 차원에서 노인을 돌보는 일도 여성들이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이렇게 해서 여성이 살기 좋은 도시는 여성 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다 살기 좋은 도시가 될 수 밖에 없어요. 공원, 오피스, 주차공간, 유치원 등을 위치시키고 설계할 때 여성의 시각이 필수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에요. 협회에서는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10년 동안 지속했고, 각 지자체의 여성 정책관들께서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개선하고 계십니다.”
한국여성건설인협회 창립 1주년 기념세미나 자료 ⓒ한국여성건설인협회

그동안 소외되었던 이들을 위해, 새로운 미래 도시가 필요하다

김혜정의 연구 분야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삶이 반영된 공간을 설계하고 건축물로 표현하는 것으로, ‘참여 디자인’이라는 세부 전공으로도 불린다. 공립학교 등 공공성이 강조되는 여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끈 그는 경기도 내 신도시 건설 계획에 참여하게 된다. 첫 프로젝트는 동탄1신도시, 두 번째 프로젝트는 위례신도시를 둘러싼 것이었다.
“위례신도시는 남한산성 아래에서 사람들이 기존 환경과 친화적으로 살 수 있도록 계획한 친환경 도시입니다. 도시의 어느 지점에서 봐도 남한산성은 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차를 타든 보행을 하든 남한산성 안에서 우리가 그 역사와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통경축을 설계했습니다.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사용하고, 보행과 자전거 위주로 신도시 내 이동을 할 수 있는 도시 구조였어요. 중심상업가에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트램을 설치하는 계획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아직 실현되지 못해 아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혜정은 직장과 문화생활, 쇼핑, 여가생활 등을 서울에 의존하지 않고 자족하는 도시를 설계하기 위해 고심하기도 했다. 부족한 부분이 보완되며, 고민한 부분들이 도시 설계에 반영되어 현실화되어 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어 그는 앞으로의 신도시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했다.
“앞으로 지어질 신도시는 미래 사회를 위한 디지털 기반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 100년 전에 마련한 모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새롭게 판을 짜야 하는 겁니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여성, 아동, 청소년,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갖추어야 합니다. 신체 건장한 성인 남성 위주의 계획 개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지요. 예를 들면 가로의 스케일은 어떤지, 또 보행로의 스케일은 어떤지, 또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지, 어떤 시설은 규모가 얼마나 돼야 그분들을 위한 시설 규모가 되는지. 무조건 크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퇴임 3년차, 김혜정은 코로나 사태를 마주하며 새로운 공간과 건축을 상상하게 되었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밀도가 높은 도시에서 밀도가 낮은 도시 외곽으로 주거지를 옮겨가는 새로운 경향이 떠오르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여전히 고밀도의 도시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의 경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직 여성들이 도시를 계획하고 설계하고 공공 건축물을 만드는 세계 최초의 도시가 우리나라에 만들어진다면 하는 상상 또한 멈추지 않는다.
“여성들이 도시 계획을 하고 중요한 공공 건축을 설계한, 세계에서 최초의 도시가 하나만 만들어지면 어떨까. 제가 이런 걸 상상합니다. 앞으로의 신도시가 그런 쪽으로 가게 되면 도시 주거 타입은 다양한 주거로 제안이 돼야 하고, 급하게 주거 문제만을 해결하는 도시가 되면 안 되는 거죠. 도시는 한 번 지어지면 100년, 200년, 몇 백 년이 가는 그런 시설이기 때문에 너무 급하게 주거 공급 위주로 신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여성들이 ‘질문하는 건축가’로 성장하기를

김혜정은 앞으로도 저서를 더 남길 계획을 하고 있다. 그는 유럽과 미국의 여성 건축가들을 소개하며 건축에서의 여성성을 정의하고자 한 <차이와 차별>, 여성 건축가들의 설계 과정과 사고방식을 무겁지 않게 풀어낸 <숙녀와 건축>의 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건축을, 또 공간을 떠나서는 살 수 없잖아요. 건축 공간 안에서 이 공간이 좋은 공간인지, 아름다운 공간인지, 나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제가 공간을 경험할 때 오감으로 느꼈던 것을 편안하게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런 걸 쓰고 싶고. 제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 책을 쓸 수 있다면, 노인이 고령이 되었을 때 도시 공간을 어떻게 체험하는지, 그때 되면 우리나라가 초고령 사회가 되니까, 초고령 사회에서 고령 친화적인 공간은 노인이 직접 체험했을 때 어떻게 설계되어야 하는지,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저서 '숙녀와 건축' (2018)
저서 '차이와 차별' (2006)
여성 건축가이자 교육자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온 김혜정은, 미래의 건축가를 꿈꾸는 후배 여성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을까. 그는 “끈기를 가지고 지속하라”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해주고 싶다며, 일을 그만두고 싶은 순간이 있어도 자신의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일을 해나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또한 남성적인 시각으로 쓰인 건축 이론과 비평 등을 모방하지 말고 여성 자신만의 언어를 찾아나가길 바란다고도 이야기했다.
“건축가는 독창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 건축 비평이라든지 건축사의 이론은 전부 남성 위주로 쓰여 있어요. 남성적인 시각에서 아름다움이란, 남성적인 시각에서 건축이란, 이렇게 쓰인 걸 주로 학교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모방할 것이 아니라, 여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적인 힘을 건축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남성을 닮으려고 하지 말고 본인 내면의 여성적인 힘을 그대로 건축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자기만의 독창적이고 유일한 언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