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역사

남한산성역사

남한산성 일반연혁

삼국시대 온조왕 13년(기원전6) 한산 아래 도읍, 하남위례성 축조
진흥왕 14년(553) 백제 동북부에 신주 설치
29년(568) 신주 설치
진평왕 26년(604) 남천주를 폐지하고 한산주 설치
경덕왕 16년(757) 한산주를 한주로 개칭
고려시대 태   조 23년(940) 한주를 광주로 개칭
성   종 2년(983) 설치시 광주목 설치
14년(995) 절도사 설치
예   종   양광충청주도 아래 광주 예속
명   종   충청도, 양광도로 개편, 양광도에 광주 소속
공양왕   경기좌우도 설치
조선시대 태   조 4년(1395) 경기좌도, 우도로 개편시 광주는 경기좌도에 속함
세조 1년(1455) 광주 좌보제 시행
연산군 11년(1505) 난언을 한 자가 있다하여 광주를 혁파함
중   종 6년(1511) 구읍을 회복하고 목사 설치
인   조 2년(1624) 1월 이괄의 난 발생
4년(1626) 광주목을 산성 안으로 이설
수어청(장관: 수어사) 설치
11년(1633) 목사겸토포사 설치
14년(1636) 병자호란 발발
15년(1637) 목사를 부윤으로 승격
효   종 3년(1652)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숙   종 6년(1680) 부윤겸수어부사 복설
9년(1683) 유수겸수어사 설치
16년(1690) 부윤겸방어사 설치
17년(1691) 부윤겸수어부사 설치
26년(1700) 수어부사 폐지
영   조 26년(1750) 수어사 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정   조 19년(1795) 경청(수어청)폐지, 유수겸수어사 설치
고   종 32년(1895) 한성부 광주군이 됨
33년(1896) 광주부가 됨
광   무 10년(1906) 광주부를 광주군으로 개칭

남한산성 축조물 관련 연혁

삼국시대 문무왕 왕12년(672) 광주 동쪽에 주장성을 축조(4,360보)
조선시대 선   조 26년(1593) 유성룡 남한산성 수어책 주장
29년(1596) 유정의 승군 60여명 남한산성 수비
30년(1597) 정유재란으로 남한산성 수축론의 대두
36년(1603) 2월 남한산성 수축론의 재론
광해군 13년(1621) 남한산성을 보장지지로 선정, 남한산성 축조
인   조 원년(1623)10월 이귀 남한산성 수축주장
2년(1624)3월 영의정 이원익 남한산성 수축 적극주장
2년(1624) 목사 유림 인화관 건립
2년(1624)4월 심기원 남한도원수로 임명, 산성보수 명령
2년(1624)6월 남양부사 유림 광주목사로 차출, 담당
2년(1624)7월 총융사 이서, 옛터에 남한산성 개축
2년(1624)9월 총융사 이서, 목사 유림 행궁 상궐, 하궐 착공
3년(1625)4월 행궁 상궐, 하궐 준공
4년(1626)11월 남한산성 개축 완료
14년(1636) 병자호란 발발
구송정 건립
16년(1638)1월 남한산성 원성 증, 개축
16년(1638) 온조왕묘 건립
현   종 9년(1668) 수어사 김좌명 연무당을 연무관으로 개칭
13년(1672) 부윤 이세화 지수당 건립
숙   종 12년(1686)윤4월 윤지선 감독아래 한봉성(한봉외성) 신축시작
12년(1686)5월 수어청 군병 동원 한봉외성 신축완료
14년(1688) 유수 이세백 재덕당 건립, 현절사 건립
19년(1693) 수어사 오시복 한봉외성 신축, 현절사에 사액 내림
우의정 민암 남한산성 봉암과 한봉에 돈대 축조 주장
31년(1705) 한봉성에 포루 두 개 증축, 청인이 한봉성을 헐어버림
37년(1711) 좌전(26칸), 우실(4칸) 증설
45년(1719) 수어사 민진후 신남성(남격대) 신축

백제시대

백제시대 남한산성 사진

백제의 왕도가 남한산성이였다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 되었다.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의 전략적인 입지조건과 수차에 걸친 백제의 천도기사로 인해 어느 때부터인가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대동야승(大東野乘)』·『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는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애초부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건만 세상사람들이 사실을 살피지 아니하고 곧장 이르기를 백제의고도는 남한산에 있으며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으니 어떻게 온조왕의 옛 성임을 정확히 알겠는가? 그래서 특히 첫머리에 써서 의심스러운 바를 알리고 성은 산아래 있었고, 그 산위에 있지 않았음을 밝힌다”고 하였다.
그는 백제도읍이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에 있으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백제시대 남한산성 사진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와 직접 관련을 맺게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남한산성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건립된 것이다. 온조왕 사당이 조선시대에 처음 건립된 곳은 충청도 직산현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온조왕 사당에 보내어 제사를 지낸 바 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남한산성이 온조가 도읍한 곳이라고 이해되고 있었기에, 이 곳에 피신한 인조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조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염원은 꿈으로도발현되었다. 즉, 꿈에 나타난 온조의 도움을 받아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청군을 물리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639년 온조사당을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정조대인 1795년에 숭렬이라는 명칭이 국가로부터 내려지면서, 이곳은 숭렬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신라시대

 신라시대 남한산성 사진

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후 당과 투쟁에 들어가는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에는 “한산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지배야욕을 드러내게 된다. 이에 대하여 신라는 물러서지 않고 임진강유역과 서해안 일대에서 본격적으로 당나라와 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하여 한산에 주장성을 축조하였다.
주장성은 당시 신라가 쌓은 성 중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한 이후 한산이라고 불린 지역은 한강 이남의 광주·하남에 해당된다.
당시의 한산지역에 남아있는 산성으로는 남한산성이 있고, 북쪽으로 5km 지점에 이성산성(둘레 1,653m)이 있으며, 서쪽으로 9km 지점에는 대모산성(둘레 567m)이 있을 뿐이다. 남한산성을 제외하고는 둘레가 4,360보에 달하는 성은 주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각종 문헌에 보이는 주장성의 규모를 살펴보면 먼저 『삼국사기』에는 성의 둘레가 4,360보라고 하였다. 보통 1보는 6척으로 환산되므로 삼국사기가 발간된 당시의 척도를 송척(1척=31cm)이라고 한다면 주장성의 전체 둘레는 4,360보X6척X31cm로 8,109.6m에 달한다. 이는 최근 측량을 통하여 밝혀진 옹성을 제외한 남한산성 원성의 수평거리 7,545m와 비교할 때 성벽의 고저차를 감안하면 거의 비슷한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남한산성 사진

인조대의 축성시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는 남한지의 기록내용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반면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주장성의 규모를 3,993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의 영조척은 한자가 31.2cm이므로 성 둘레는 7,475m이다. 『삼국사기』의 보계치에 비해 600m 정도 차이가 있다. 이후 17세기 들어 인조대에 개축한 남한산성의 규모는 6,297보이다.
이는 주척으로 계측한 것이며, 주척의 길이를 21.5cm로 할 때 전체 둘레는 8,123m에 달한다.
이것은 선조때에 포백척으로 17,400척이라 한것과 비교하면 포백척의 단위길이를 46.73cm로 하면 전체 둘레는 8,131m로서 주척으로 환산한 보계치와 거의 같다. 이러한 기록자료를 통해 볼 때신라 주장성은 인조때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원성과 거의 같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남한산성 사진

고려시대에는 남한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광주부사를 지낸 이세화 묘지명(李世華 墓地銘)에 보면 1231년 몽고병의 1차 침입시 광주군민들은 ‘광주성(廣州城)’으로 피하여 몽고군의 공격을 방어하였으며, 1232년 2차 침입시에도 살례탑(撒禮搭)이 이끄는 몽고군의 주력부대가 광주성을 공격해왔으나 이세화가 물리쳤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광주성은 읍치에서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민들이 들어가 방어하기 유리한 산성이었음을알 수 있다. 현재 광주지역에 소재하는 주요 산성으로는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이 있다. 그중 이성산성은 6세기 중엽 신라에 의하여 축성되었으며, 또한 이성산성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지만 규모가 작고 해발 209m 정도여서 공격적 전진기지이자 행정중심의 성이지 많은 주민들이 들어가 장기간 농성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반면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성내부 면적이 넓고 많은 적을 상대하기에 유리하다. 또한 성내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와편으로보아 당시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광주성으로 기록된 성은 남한산성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남한산성 사진

인조대의 축성시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는 남한지의 기록내용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반면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주장성의 규모를 3,993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의 영조척은 한자가 31.2cm이므로 성 둘레는 7,475m이다. 『삼국사기』의 보계치에 비해 600m 정도 차이가 있다. 이후 17세기 들어 인조대에 개축한 남한산성의 규모는 6,297보이다.
이는 주척으로 계측한 것이며, 주척의 길이를 21.5cm로 할 때 전체 둘레는 8,123m에 달한다.
이것은 선조때에 포백척으로 17,400척이라 한것과 비교하면 포백척의 단위길이를 46.73cm로 하면 전체 둘레는 8,131m로서 주척으로 환산한 보계치와 거의 같다. 이러한 기록자료를 통해 볼 때신라 주장성은 인조때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원성과 거의 같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남한산성 사진남한산성 사진

조선시대 초기부터 남한산성은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
왕권의 안정을 이룩한 태종 대에 남한산성 수축 문제가 제기 되었으며 그후 세종대에 들어서 경기 군기 점고 찰방의 건의에 따라 강화의 교동산성과 함께 풍년을 기다려 수축하도록 하였으나 수축이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후 수축문제가 다시 논의 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2월이며 광해군 때인 광해군 13년(1621)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또한 남한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된 것은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사이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유사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주는 보장지로 인식되었기에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주둔하였고 사도유수부의 하나가 되었던것이다.

일제강점시대

일제강점시대 남한산성 사진

개항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외세, 그 중에서도 일본은 점차 침략자로서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척사사상을 갖고 있는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항쟁이 펼쳐졌다.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경기의병이 남한산성에 집결한 것은 2월 23일이었으며 2월 28일 이천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그후 서울진공계획이 있었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회유된 김귀성이 남한산성 서쪽 성벽에 파손된 사실을 관군에게 알렸고, 이곳을 통하여 관군이 일시에 남한산성 내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함락되어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되었다.
그후 일본은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군대 관활하에 있던 병기와 탄약을 모두 회수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의 각 사찰에 보관중인 무기와 탄약은 신속히 제거하기위해 일본군에의해 폭파되었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3·1운동이 펼쳐졌다.
이 날 시위는 새벽 남한산성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남한산성 남문 아래 계곡에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1930년대 들어 남한산성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당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남한산성내에도 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중심이 되어 중부면 산성리에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가 그것이다.
노동자·농민을 의식화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자, 지하로 잠적하였다. 그러나 수년 후 다시 조직을 재건, 광주공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34년 12월에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월 1회씩 노동회관에 모여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노동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하였으며, 서울 영등포와 인천 등지에까지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36년 1월 조직원이 실수로 노상에서 분실한 조직관련 물건이 일본경찰 손에 우연히 들어가 조직은 붕괴되고 말았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조직된 운동단체가 공장 밀집지역인 영등포와 인천에까지 조직원을 파견하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점이다.

해방이후

남한산성 사진

해방이후에도 한동안 산성 마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식민지하 사회주의운동의 전통은 강하게 이어져, 한국전쟁 당시 산성 마을은 ‘제2의 모스크바’ 로 불려질 정도였다. 일제시대 경찰 사찰주임을 지낸 면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가택에 연금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한편 전쟁은 남한산성 문화재를 크게 훼손시켰다. 포탄이 성벽에 떨어져 성벽 일부가 파손되었고, 남한산성 초등학교는 교사가 전소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민들은 산성 마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였다. 행궁터에 남한산성과 관련된 문화유산과 물산이 지정된 물산 진열관이 있었다. 산성 주민들은 이 진열관이 장차 남한산성 공원 박물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기대 하였기에 박물관이라고 부른데서, 그같은 그들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

도립공원시대

남한산성 사진

1950년대에 들어 남한산성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4·19 민주화 운동 후 제2공화국때 남한산성 국립공원 지정은 무효화 되었다.
그후 1971년 3월 17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1974년 광지원에서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남한산성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로가 포장되지 않은데에 따른 불편함을 호소하여 포장공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 도로의 포장으로 남한산성 교통망은 크게 개선되었다.

남한산성 사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인근 지역 주민들이 남한산성을 찾기가 매우 용이해졌다.
한편 1974년 중부면 사무소가 산성리에서 광지원리로 이전하였다. 도립공원 지정 이후 남한산성 문화재에 대한 보수 정비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성곽 5.1km를 보수하는데 모두 40억 3,600만원이 투입되어 남한산성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갔다.
1976년 문화재를 보호하고 공원의 시설물을 유지, 관리하기 위해 남한산성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자가용의 보편화 되면서 찾기 편리한 남한산성은 서울 인근의 유수한 문화관광지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마을의역사

남한산성 사진

남한산성내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아주 먼 과거로 올라가겠지만,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취락이 형성된 것은 인조5년(1627)에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으로 옮기고 나서부터라고 하겠다. 현재 남한산성 내 마을의 행정구역은 ‘산성리’이며, 1914년 일제가 조선의 지방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부터 이처럼 불리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조선후기 광주유수부 시기에 두 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어져 있었다.
광주 행궁에서 동문에 이르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남쪽은 남동, 북쪽은 북동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남한산성 사진

그러다가 1910년경 산성내 마을은 군내면 광주읍에 속하게 되고, 마을은 광주읍 동부, 광주읍 서부, 광주읍 남부, 광주읍 북부, 광주읍 중부 등 5개의 행정단위로 나누어졌다. 그러다가 1914년 광주읍 5개 마을이 중부면 산성리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1917년 광주군청이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하면서, 300여 년간 화려한 군사·행정 중심지였던 남한산성내 산성리 마을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산성리 마을은 풍부한 농경지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행정 중심지로서의 기능만을 수행한 곳이었다. 따라서 광주군청과 함께 치안·체신기관이 떠난, 교통조차 불편한 산촌 마을인 산성리는 주민들이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다.
1,000여호 4,000여 인구를 자랑하는 산성리 마을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주민들이 서울과 광주, 여주, 이천, 양평 등지로 떠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호로 줄어, 산성리는 한적한 산촌 벽지로 변하였다. 한편 산성리 마을에는 산성 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금림조합이 결성되어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