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SCO World Heritage
Namhansanseong in Gyeonggi-do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소개

최종 수정일 : 2022-08-29 09:41

일제강점시대 남한산성 사진

개항이후 물밀 듯이 들어온 외세, 그 중에서도 일본은 점차 침략자로서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이후 척사사상을 갖고 있는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항쟁이 펼쳐졌다. 1896년 봉기한 경기의병의 의병투쟁 거점은 남한산성이었다. 경기의병이 남한산성에 집결한 것은 2월 23일이었으며 2월 28일 이천의병부대와 합세하여 남한산성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그후 서울진공계획이 있었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회유된 김귀성이 남한산성 서쪽 성벽에 파손된 사실을 관군에게 알렸고, 이곳을 통하여 관군이 일시에 남한산성 내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함락되어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되었다. 그후 일본은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군대 관활하에 있던 병기와 탄약을 모두 회수하였다. 이때 남한산성의 각 사찰에 보관중인 무기와 탄약은 신속히 제거하기위해 일본군에의해 폭파되었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3·1운동이 펼쳐졌다. 이 날 시위는 새벽 남한산성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남한산성 남문 아래 계곡에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1930년대 들어 남한산성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당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남한산성내에도 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중심이 되어 중부면 산성리에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가 그것이다. 노동자·농민을 의식화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자, 지하로 잠적하였다. 그러나 수년 후 다시 조직을 재건, 광주공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34년 12월에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월 1회씩 노동회관에 모여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노동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하였으며, 서울 영등포와 인천 등지에까지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36년 1월 조직원이 실수로 노상에서 분실한 조직관련 물건이 일본경찰 손에 우연히 들어가 조직은 붕괴되고 말았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조직된 운동단체가 공장 밀집지역인 영등포와 인천에까지 조직원을 파견하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