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SCO World Heritage
Namhansanseong in Gyeonggi-do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소개

최종 수정일 : 2022-08-29 09:41

조선시대 남한산성 사진 조선시대 남한산성 사진2

조선시대 초기부터 남한산성은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이미 논의되고 있었다. 왕권의 안정을 이룩한 태종 대에 남한산성 수축 문제가 제기 되었으며 그후 세종대에 들어서 경기 군기 점고 찰방의 건의에 따라 강화의 교동산성과 함께 풍년을 기다려 수축하도록 하였으나 수축이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후 수축문제가 다시 논의 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36년(1603) 2월이며 광해군 때인 광해군 13년(1621)일부 수축이 이루어졌다. 또한 남한산성이 대대적으로 수축된 것은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사이였다. 수축 결과 남한산성은 성의 둘레가 6,297보가 되었다.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유사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켜주는 보장지로 인식되었기에 5군영의 하나인 수어청이 주둔하였고 사도유수부의 하나가 되었던것이다. 인조대의 축성시 “옛 터를 따라 남한산성을 다시 쌓게 하였다”는 남한지의 기록내용은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한다. 반면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주장성의 규모를 3,993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의 영조척은 한자가 31.2cm이므로 성 둘레는 7,475m이다. 『삼국사기』의 보계치에 비해 600m 정도 차이가 있다. 이후 17세기 들어 인조대에 개축한 남한산성의 규모는 6,297보이다. 이는 주척으로 계측한 것이며, 주척의 길이를 21.5cm로 할 때 전체 둘레는 8,123m에 달한다. 이것은 선조때에 포백척으로 17,400척이라 한것과 비교하면 포백척의 단위길이를 46.73cm로 하면 전체 둘레는 8,131m로서 주척으로 환산한 보계치와 거의 같다. 이러한 기록자료를 통해 볼 때신라 주장성은 인조때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원성과 거의 같은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유수부의 흔적으로 남한산성에는 광주유수나 부윤들의 비석들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