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ESCO World Heritage
Namhansanseong in Gyeonggi-do

경기도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남한산성 소개

최종 수정일 : 2022-08-26 14:38

백제시대 남한산성 사진

백제의 왕도가 남한산성이였다는 견해는 이미 조선 초기부터 꾸준히 제기 되었다. 한강유역에 도읍을 정한 백제는 내·외적인 여건으로 인하여 하북위례성-하남위례성-한산-한성 등 여러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람들은 남한산성의 전략적인 입지조건과 수차에 걸친 백제의 천도기사로 인해 어느 때부터인가 남한산성이 백제의 왕도 중 하나일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대동야승(大東野乘)』·『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지자료는 남한산성이 백제의 고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저자인 홍경모는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애초부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건만 세상사람들이 사실을 살피지 아니하고 곧장 이르기를 백제의고도는 남한산에 있으며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백제사는 기록이 소략하여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으니 어떻게 온조왕의 옛 성임을 정확히 알겠는가? 그래서 특히 첫머리에 써서 의심스러운 바를 알리고 성은 산아래 있었고, 그 산위에 있지 않았음을 밝힌다”고 하였다.
그는 백제도읍이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에 있으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백제시대 남한산성 사진2

남한산성이 백제 온조와 직접 관련을 맺게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병자호란 직후인 1639년 남한산성에 백제 시조 온조왕의 사당이 건립된 것이다. 온조왕 사당이 조선시대에 처음 건립된 곳은 충청도 직산현이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예조판서 김상헌을 온조왕 사당에 보내어 제사를 지낸 바 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남한산성이 온조가 도읍한 곳이라고 이해되고 있었기에, 이 곳에 피신한 인조가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온조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염원은 꿈으로도발현되었다. 즉, 꿈에 나타난 온조의 도움을 받아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청군을 물리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인 1639년 온조사당을 직산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으며 정조대인 1795년에 숭렬이라는 명칭이 국가로부터 내려지면서, 이곳은 숭렬전으로 불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