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 기록하는 경기감영·경기도청 자막
고려시대 수도 인근에 있던 경현과 기현이 행정구역 경기의 유래가 되었다. 성종 14년 개경 주변에 적현 6곳과 기현 7곳을 설치했고, 현종 9년, 1018년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서울을 아우르는 왕정, 왕의 정치를 우선적으로 시행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경기제가 이때부터 실시되었으며, 그것이 지방제도의 형태인 도제로 발전 현재의 경기도가 형성되었다. 조선 초기 경기를 관할하는 관서의 건립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한다. 경기를 좌우로 나누지 않고 전체를 주관하는 도 관찰사의 근무처를 수원에 두었다는 언급은 태조 연간부터 진행되어 온 경기권역의 행정 개편이 일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경기감영은 세종 30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서 광주로 옮겨온다. 경기 관찰사의 광주 목사 겸임 때문이다. 세종 30년 4월 5일의 일이었다. 당시 광주 목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로 이곳이 광주목의 치수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직도 교산동 일대는 조선시대 읍지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였던 향교가 광주향교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남아 도읍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주변에서 대형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경기 문화재 연구원에 의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장기간 진행되었는데, 조사 대상 건물지에서 광주객사 명의 기와가 출토되어 광주 읍지 관련 시설이었음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1450년까지 광주에 있던 경기감영은 이후 한성부의 반송방으로 옮겨진다. 한양 도성도에는 그 당시 한성부 반송방 경기감영의 위치가 잘 드러나있다. 당시 반송방의 위치는 현재 서대문 일대이다. 반송방이라는 이름은 모화관 근처에 그늘이 수십에 이르는 반송이 조선 후기까지 있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반송방은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의주로의 시작점으로 중국과 오가는 중요한 노선이었다. 여기에 경기도를 관할하는 경기감영, 말을 빌려주던 고마청, 중국사신을 영접했던 모화관등이 위치했다. 경기감영은 인조 14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에 대한 공포와 방어체계의 중요성이 제고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관찰사를 대도호부로 승격시켰고 부윤을 겸직하는 것을 제안했다. 당시 경기관찰사가 연평도호부사를 겸직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연평도호부의 위치는 여지도서의 포천현 집도리로 기록되었다. 포천반월성 인근이다. 이후 연평도호부 외형은 인조가 즉위한 1623년에 폐지되어 다시 서대문 밖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열두 폭 병풍인 경기감영도는 조선 후기 돈의문 밖을 그린 그림으로 경기감영 일대를 소재로 하고 있다. 경기감영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기감영, 경기빈관, 경기중영, 고마청 등은 건축 실상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더불어서 당시에 활발하고 다양한 도시 풍경들이 실감나게 표현되었다. 또한 감영도에는 전체 감영의 칸수와 건물의 구조까지 상세하게 표현되어있다. 경기감영은 의주로를 향해난 정문인 포정문을 지나 감영의 정청인 선화당으로 연결되는 삼문구성의 진입 공간과 선화당을 중심으로 하는 감사 공간 뒷면의 후원 공간 부속관원 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조선시대 감영의 전통적인 배치 형식을 따른 것이지만 다른 도의 감영에 비해 비교적 간단한 배치 구성을 보이고 있다. 2017년 4월 서울 돈의문 삼 구역 도시환경 정비사업 부지 내 유적 발굴 조사 현장에서 경기감영도 속 선화당 뒤편 방형 연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조사 지역에 대해 작업을 진행하고 나서 경기감영도를 참고하여 상세하게 유구 상황을 파악해 보았다. 지속적인 도로확장과 지하철 공사 그리고 빌딩 공사에 의해 대부분의 경기감영 권역은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연지를 비롯하여 적심과 기단석렬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된 곳은 건물지가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잔존하고 있는 유구를 통해 경기감영도 등의 자료를 토대로 해석한 결과 내아 권역, 사후 권역, 연지 등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경기감영 북쪽 민가 권역에서 우물과 석렬, 적심이 확인되었다. 고종 39년인 1902년 3월 9일 승정원 기사를 보면 한성부와 평양 이대대가 경기감영터를 함께 전용한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후 서대문 감영 건물의 모습은 몇 장의 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성부로 사용되고 있는 옛 경기감영 일대의 모습이다. 서대문 경기감영 또는 한때 고양 군청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일본 거주민 국립소학교 교사사택과 조선 적십자 간호부 양성소로도 사용되다가 1929년 적십자사 조선본부 건물이 신축되면서 결국 헐리고 말았다.
수원에 있었던 경기감영은 다시 세종로로 돌아오게 되는데 1910년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관찰도를 경성으로 옮긴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1910년 10월 2일 자 매일신보에도 내부 청사로 신축하는 건물에 경기 관찰도가 이전한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경기도청이 주인이 된 이 건물은 원래 내부 청사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고종 44년 의정부가 기능을 잃은 후 그 자리에 신축 건물을 지은 것이다. 벽돌 조 2층 건물로, 일자형 평면 양 끝에 수직으로 날개체가 붙는 평면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내부 청사 건물이 있던 세종로 일대에서는 의정부와 경기도청사 터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 앞 육조거리의 원형을 회복하고 시민들이 역사 문화유산의 가치를 충분히 향유할 수 있도록 2016년부터 의정부터 발굴 조사를 시작했고 더불어 근대 경기도청의 흔적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발굴 현장에서는 의정부 건물 외에 경기도청의 본관 왼쪽 날개체 바닥층 일부와 부속 건물과 기계실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확인할 수 있다. 경기도청사 시절부터 그 자리를 지켜왔던 백 년 수령의 측백나무는 새로 지어지는 경기도 광교 청사 터로 이식되어 경기도의 역사성을 기록할 예정이며, 당시 도청의 중요한 문서보관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 근대 건물의 일부가 함께 이전되어 새로 시작되는 경기도의 천년을 함께할 예정이다. 해방과 함께 미군은 한반도 38도선 이남에서 군정을 실시했다. 이를 위해 미군정을 설치하고 서울시를 경기도 관할로부터 분리하여 서울특별시로 개편한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경기도청사 이전 논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세종로 경기도청사를 미군정이 사용함으로써 경기도청의 사무공간이 청사 밖으로 이동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경기도청은 1945년 12월 24일부터 조선 재련 주식회사에 새로 사무실을 마련하고 업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이 철수함으로써 경기도청은 같은 해 11월 세종로 청사로 복귀했고 그 이후 경기도 유치경쟁이 시작되었다. 6.25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2년 재개된 지방자치는 경기도가 경기도청사를 경기도 내로 이전시키고 지방 자치행정을 펼칠거라는 기대를 확대시켰다. 인천과 수원을 중심으로 청사 이전 경쟁이 활발했는데 10년여의 경쟁 끝에 1964년 수원시 이전이 결정되었다. 1964년 10월 15일 경기도청사 신축 기공식이 열렸고, 1967년 6월 매산로 경기도청 청사가 완공되었다. 경기도청의 수원 이전은 수원시가 경기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매산로 일대를 개발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당시 새로운 경기도청의 위치는 팔달산 서쪽 기슭으로 수원역과 수원 구도심인 수원 화성과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50여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경기도 구청사. 관공서 건물 중 보기 드물게 앞마당 즉 중정을 가진 미음자 형으로 계획되었다. 경기도청이 한강 남쪽인 수원으로 옮겨짐에 따라 1967년 북부 출장소가 마련되어 이원적 행정체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경기도 북부 출장소는 이후 의정부에 신청사를 신축하여 경기도 북부청사로 개칭하고 고양시, 구리시 등 한강 이북 즉 경기 북부 지역의 행정사무를 담당해왔다. 천 년의 시간을 흘러 오늘에 다다른 경기도청. 경기도청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도정이 확대됨에 따라 구관에 이어 신관과 별관 등이 증축되면서 규모를 키워서 오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청사 구관은 2017년 8월 8일 근대 문화유산 제688호로 지정되었다. 한국 건축계의 큰 흐림인 모더니즘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역사성, 상징성, 지역성을 지닌 건물로 인정받은 것이다. 경기도청사 구관은 1300만여 명의 경기도민들의 삶이 깃들어있는 공간이다.
이제 경기도는 새천년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2020년 12월 광교에 신청사가 문을 여는 것이다. 경기도는 소통력을 높이기 위해 행정, 업무, 상업, 주거, 문화, 위락 등이 복합되어 있는 광교 도청역 주변의 중심 상업지구를 신청사를 중심으로 한 고밀복합 단지로 만들 계획이다. 경기도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실용지학을 중시하고 개방성과 융합성을 보여주며 우리 역사 발전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이제 그 힘으로 대한민국 만의 경기도가 아닌 세계 속의 경기도로 거듭나기 위해 경기도는 또다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